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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9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불치하문(不恥下問)

불치하문(不恥下問)




일찍이 '아는 것’의 경쟁력을 간파했던 프란시스 베이컨의 통찰력이 놀랍다.
연륜의 관록이 쌓일수록 감탄하게 되는, 삶의 진리라는 생각이다.  특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갈수록 그 위력의 범주가 넓혀지고 있는 추세다.
거듭되는 진화를 통해 우리에게 ‘문명'을 공급하고 있는  컴퓨터나 스마트 폰만 해도 그렇다. 새로운 기능을 발견할 때마다 신대륙을 발견할 당시의 콜럼부스 못지않은 문화 충격을 경험하게 된다.  간단한 기능 하나에 세상살이 절차가 훨씬 더 수월해지는 현실이라니, 그 반가움 때문에 둔한 손놀림으로라도 기능을 익히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섣불리 아는 척하기보다 아예 모른다고 하는 게 모두의 평화를 위해 백 번 낫다. 
다만 어설프게 알고 있는 경우엔 반드시 조금 다른 처신이 필요하다.     
얼마 전 미국 방문 때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보스턴에서 렌터카를 빌렸는데  유학할 당시 오랫동안 거주해서 지역사정에 밝다는 어설픈 자신감이 화근이었다. 네비게이션 없이 캠브리지, 하버드, 엠아이티 등 대학 캠버스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길을 잃고 만 것이다. 예전에 잘 알고 있었던 길들이 지금은 많이 바뀌어 낯선 환경이 되어버릴 만큼 흘러가버린 세월의 간극을 의식하지 못한 패착의 결과였다. 
결국 한 시간여를 뱅뱅 돌며 길 위에 뿌리고 나서야 목적지를 찾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인위적인 길안내에 의존했다면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었을 텐데 후회막급이었다.  
 
어설픈 잘난 척으로 이 보다 더 심각한 폐해를 초래하는 곳이 있다.
바로 정치판이다.
천양각색의  성향이 모인, 흔히 엘리트집단의 집결지로 인식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징후는 얼마든지  있다.  
얄팍한 지식만으로 전문가연하는 사람들이 만연해 있다.  완전치 못한 지식을 인정하거나 겸양의 도로 스스로를 낮추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 정도 수준이면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나마 양호한 축이다.
문제는  어설픈 지식을 바탕으로 형성된 신념을 고수하는 '치명적인 폭탄들'이다.  신앙이 되어버린 신념은 바꾸기 힘들 뿐 아니라 주위의 많은 이들을 미혹에 빠뜨린다는 점에서 거의 통제불능 상태다.        
결국 사교집단 유형과 흡사하다는 생각이다. 종교를 잘못 이해하거나 이해시키려는 시도들이 우리 사회에 악영향을 끼친 전례를 보면 수긍이 갈 것이다. 
 
 30여년의 세월이 얹힌 오래 전, 하버드에서 공부할 당시,  친구들은  모르는 것이 생기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질문을 던지거나  답을 구하는 나를  낯설어 했다.  하버드에 다니면 뭐든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자부심과 배치된다는 반발심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그 모습이  내 본연의 성정이라는 걸  알고 난 후부터는 호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급기야 '홍문종만의 강점'으로  인정하는 친구들도 생겼다.   
(그 때부터 불치하문(不恥下問) 의 도리를 실천하고 있었던  걸까?)  
  
아는 것은 확실히 힘이 된다,
그러나 지도자들의 잘못된 신념이 얼마나 무서운 민폐로 작용하는가를 간과해서는 안되겠다. 멀게는 세기의 독재자, 히틀러나 무솔리니, 그리고 가까이에는 최근 ‘나치 식 개헌을 배우자’는 망언으로 분통을 터뜨리게 하는 일본의 아소 부총리 등이 그 단적인 예다.
그런 점에서 지도자급 위치에 오르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할 수 없게 만드는  우리 문화 역시 자유롭지 않다. 심지어 특정 미션을 강요당하는 일까지 있다. 그런 것들이 국민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깊어질 수 밖에 없다.   
   
특별히 국회 등 정치권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스스로의 약점을 용기있게 고백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 지도자에게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기회의 허용이 필요하다.  그것도 무제한으로. 
더불어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할 수 있게 하고  교정을  독려하는 사회적 배려야말로  배놓을 수 없는 덕목이지 싶다.  

그것이 비로소 우리 사회를 올바르게 이끌 수 있는 최적의 답이 아닐까 싶다. 


(2013. 8. 8)




...홍문종 생각

2011년 10월 7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굿 바이~ 잡스

굿 바이~ 잡스

이번에는 스티브 잡스의 부음이 지구 건너편으로부터 날아들었다.
예고된 불행이었지만 무거움이 가슴을 파고드는 소식이었다.
남다른 삶의 자취를 남기고 홀연히 떠나 버린 천재의 부재를 알리는 조종소리에 온 종일 회색빛에 갇혀 헤맨 사람은 아마도 나 하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외롭지 않은 그의 마지막이 한 줌 위안이 됐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전 세계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어 세상과의 인연을 거두는 스티브 잡스를 배웅했다. 많은 이들이 진심을 다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인류역사의 새 기원을 마련한 고인에 대한 예우를 잊지 않았다. 그렇게 스스로의 삶에 최선을 다해 세상을 잘 살다간 영웅의 자취를 기려 주었다.

언젠가 잡스가 자신을 있게 한 인생의 결정적 축복, 3가지를 얘기한 적이 있는데 일반적인 판단으로는 축복은커녕 인생 가도에 걸림돌이 되기에 충분한 최악의 설정들이었다.
실제로 돈이 없어 6개월만에 대학을 포기했고 자기가 만든 애플에서 축출됐다. 그리고 예고된 죽음 앞에서 언제 죽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두려움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잡스는 그 어느 것도 자신의 인생에 해악을 끼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는 대학의 중도 포기는 흥미에 따라 다양한 공부를 접할 수 있는 기회로, 애플에서 쫓겨나 백수가 됐을 때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재정비하는 시간으로 만들었다. 죽음이 예고된 인간의 한계의 경우, 하루하루를 마지막인 것처럼 충실하게 지내는 방법으로 반전을 꾀했다. 인생의 걸림돌이 될 가능성들을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순기능적 상황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결국 그런 기질들이 잡스가 IT 업계의 독보적 존재로 자리매김하는데 일조한 결정타로 작용한 셈이다.

곳곳에 명료하게 박혀있는 巨人의 자취가 연일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들여다보니 56년이라는 길지 않은 삶을 통해 고인이 세상에 남긴 업적들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새삼스럽다.
무엇보다 동갑내기로 동시대를 살아온 깊은 인연이 있는 내게 그의 생애는 남다른 감회일 수 밖에 없다. (그것도 불과 40여일 정도 뒤늦게 태어난 미세한 시차다)
그래서인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스티브 잡스 관련 자료를 더듬으며 나의 삶과 비교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사생아로서 불우한 성장과정을 거친 잡스와 내가 환경적 측면에서 일치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여건은 다르지만 나 역시 잡스 못지않은 굴곡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선은 내 화려한(?) 학업 이력을 꼽을 수 있겠다.
잡스처럼 학교를 도중에 그만 둔 건 아니지만 잡스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 전적이다.
다양한 분야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았던 중고교 시절 천당과 지옥을 오가던 성적을 비롯해서 초등학교 4번, 중학교 2번의 전학생활로 쌓은 내공의 역사,(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고군분투를 생각해보라), 거기다 미국 유학을 통한 신학, 행정학, 교육학, 법학, 정치학 등 엄청나게 다양한 학문의 종류는 둘째치고 내가 다닌 대학 역시 일일이 열거하려면 필기구가 필요할 정도다. 그 과정에서 학생회장이나 반장등 수없이 많이 당선의 영광도 있었지만, 낙선의 다양한 이력 역시 만만치않다.
고려대를 비롯해서 미국의 리버티, 스탠포드, 하버드 그리고 동경대와 북경대를 돌면서 4개의 석사 학위와 3개의 박사학위를 남겼으니 하는 말이다.
이러한 결과물들은 끊임없는 지적 호기심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갈망이 몸살을 앓던 청소년기의 내 방황의 역사이기도하다.

2번의 국회의원 뱃지를 달았던 정치 과정도 순조롭지 않았던 건 마찬가지다.
복잡한 사연이 펼쳐지는 와중에 탈당도 했고 공천탈락도 겪었다. 한참 잘나가던 한나라당 경기도당 위원장 시절에는 잠깐의 방심으로 내부세력의 표적이 되어 좌절을 겪기도 했다. 말도 안되는 선거법 위반에 발목을 잡혀 오랜 시간 동안 분루를 삼키는 와신상담을 경험하기도 했다.
결국 그런 시간들이 또 다른 측면에서 정치적 내공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아픈 상흔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지금 이 순간에는 전 세계에 울림을 주고 있는 그에 대한 부러움이 내 뇌리를 지배하고 있다.
잡스처럼 전 세계까지는 아니어도 나의 조국, 대한민국 땅에서만큼은 반향을 줄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소망이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계속 갈망하라 여전히 우직하게(Stay Hungry, Stay Foolish)'
그의 힘 있는 목소리가 하루를 정리하는 내 귀에 또렷하게 각인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당신의 소망은 반드시 이룰 수 있습니다”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
내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는 잡스의 격려가 에너지를 생동시키고 있다.

굿 바이~ 잡스.


....홍문종 생각
(2011. 10. 7)

2011년 9월 30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왕도는 찾으면 된다

왕도는 찾으면 된다
 
그의 삶은 진정 아름다웠다.
‘성문종합영어’의 저자, 송성문 선생의 부음을 뒤늦게 접하는 순간 내 의식을 지배한 생각이다. 어려웠던 시절, 체계적이고 수준 높은 참고서로 우리들의 영어 학습을 위해 애쓰셨던 선생의 노고를 되새기노라니 감사한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숙연한 마음으로 고인의 명복을 기원하는 바이다.   
 
7, 8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에게는 '성문종합영어'(내가 공부할 때만 해도  ‘정통종합영어’였다)란 이름의 참고서는 결코 낯설지 않을 것이다. 1967년 첫 선을 보인 이후 지금까지 1000만권 정도가 팔렸다고 하니 그야말로 낙양의 지가를 올린 명저 중 명저라 할 수 있다. 오랜 시간 영어의 바이블이라는 닉네임으로 정상을 지켜 온 명성에 걸맞게 한 시대를 풍미한  책이었다. 실제로 당시 대학입학 관문을 통과하려면 반드시 이 책을 마스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최고의 교재라는 인식이 강했던 게 사실이다.
비교적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내 영어의 근간도 따지고 보면 중학교 당시 ‘practical English’(故장영희 교수의 부친인 故 장왕록 교수님이 저자)를 거쳐 고등학교 때 연을 맺은 ‘성문종합영어’가 미친 영향이 크다.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만 해도 지금처럼 달리 영어를 공부할 방법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지방에서 올라온 친구 중에는 테입 리코더조차 낯설어 하는 경우가 많았던 시절의 얘기다.
우리들의 영어 교육에 성문종합영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학생이면 누구나 성문종합영어 책 한권씩은 다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나만 해도 집에 한 권, 학교에 한 권, 휴대용 한 권 해서 총 3권을 갖고 영어공부에 매달렸다. 특히 휴대용 책은 챕터 별로 분해해서 부피를 줄여 늘 끼고 다니다시피 했다. 종로 2가 경복학원인가에서 저자의 강의를 듣기도 했는데 영어가 절로 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심지어 10여년 미국 생활에서 영어가 헛갈리는 상황에서 제일 먼저 꺼내들게 되던 책도 바로 이 책이었다.
성문종합영어의 압권은 누가 뭐라고 해도 문학, 철학, 정치 등의 장르를 망라하며 제시되는 ‘예문’의 화려함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성문종합영어가 주옥같은 명문들을 내 기억에 입력시킨 매개체가 됐다는 데 더 깊은 의미를 두게 되는 것 같다.
저 유명한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이나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로 시작되는 케네디 미 대통령의 취임 연설문 일부는 깊이 각인돼 지금도 전율이 느껴질 만큼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송 선생은 자신의 스테디셀러에서  ‘There is no royal road in mastering English’(영어에는 왕도가 없다)를 비롯 Rome was not built in a day(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는 등의 경구로 영어 정복의 길이 길고 험하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 당시 목표였던 하버드 대학 입학이라는 설정에 다가가고자 하는 열망을 더 아쉽고 절실하게 키웠던 것 같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절대로 영어를 포기할 수 없다는 오기를 다졌었다.
오십을 훌쩍 넘긴 이 시점의 내가 세운 인생의 목표는 무엇이고 나는 또 얼마나 열심히 매진하고 있는 걸까? 영어에 대한 도전과 집착을 통해 일정정도 성과를 거뒀던 것처럼 지금의 내가 매달리고 있는 주제 역시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는 걸까?
지금 이 순간  나의 까까머리 시절을 사로잡았던 꿈과 희망을 대체하고 있는 새로운 나의 ‘현실’을 점검한 끝에 
도달한 나의 결론은 의외로 간단하다.
꿈이 있었고 목표가 있었고 도달할 방법이 있었으니 행복했던 그 때처럼 지금 역시 꿈과 목표, 열성은 물론 삶의 경륜이 덤으로 준 노하우까지 있으니  그 때 보다 더 잘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비록 일면식도 없지만 오래 전 나의 꿈과 목표를 성취하는데 동반자가 돼 주었던 고인에게 감사드린다. 
더불어  나의 새로운 꿈과 목표를 확인하는 이 밤이다.  
왕도는  찾으면 된다. 
전진, 전진....
                         (2011. 9. 30)                 
                               ....홍문종 생각              

2011년 6월 23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살아가면서 주변의 흥망성쇠를 지켜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 가운데 남다른 인연을 나눈 사람의 성공은 당사자 못지않은 기쁨을 누리게 한다는 측면에서 특별하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회원국 만장일치로 연임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내게 있어 그랬다.
전 세계가 ‘조용하고 당찬 반기문표 리더십’을 인정하고 그에게 다시 일할 기회를 허락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뛸 듯이 기뻤다.
하버드 행정대학원에서 그와 함께 공부한 인연이 못내 자랑스럽다. 더구나 하버드 행정대학원 동창회장을 맡고 있는 나로서는 전 세계가 쌍수를 들어 연임을 환영한 ‘세계 대통령’을 모임의 일원으로 둔 호사를 누리는 셈이니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양 종일 기분이 좋은 건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처음 유엔 사무총장에 임용될 당시만 해도 카리스마 부재네 뭐네 하면서 그에 대한 여러 걱정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지난 번 방한 당시 그가 동창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연임 의지를 밝혔을 때 확신보다는 기원하는 마음이 컸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자랑스러운 우리의 동창이 마침내 자신의 뜻을 이루고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반총장은 훌륭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다.
낮고 겸허한 목소리로 국제사회를 설득하고 공동의 해법을 모색하는 반기문 총장의 리더십이 새삼 화제가 되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무엇보다 그의 훌륭한 달란트가 전 세계 인류의 공영을 위해 쓰일 수 있으니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실제로 ‘매일 아침 일을 시작할 때 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마땅한 도리를 하고 있는지 늘 생각하고 여성이나 약자 등 소외계층을 만나면서 희망을 주려고 노력한다’는 수칙은 오래 전 우리가 지켜보았던 그의 모습 그대로다.
하버드 시절, 누구보다 성실했고 겸손함으로 일관하면서 주위에 최선을 다하는 매너를 잃지 않던 신사로서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일전에도 밝힌 바 있지만 하버드에서 교내 은행에 내걸린 만국기 대열에서 태극기가 빠져있는 사실을 알리자 여러 곳을 수소문해서 기어이 태극기를 찾아내던 그의 성실함을 일찍이 경험한 바 있다. 10살이나 어린 우리들과의 어울림을 마다하지 않고 보살펴주던 마음씨 따뜻한 장형의 모습으로도 기억되는 그다. 때도 없이 어설프고 치기어린 국가관을 토설하는 우리들의 만용을 끝까지 경청한 뒤에야 외교 전문가로서의 자신의 견해를 보태며 조심스럽게 우리를 이끌어줬다.
도움이 필요할 때 손을 내밀면 언제고 달려와 서슴없이 잡아주던 맘 좋은 이웃 같던 그와의 인연이 더없이 소중하다는 생각이다.


세대간 갈등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요즈음이다.
개인과 개인이,국가와 국가가 서로 반목하며 미처 다 헤아릴 수도 없는 갈등을 빚어내는 풍경을 보면 이대로 치유 불가능의 상태로 고착되는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날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반기문 총장의 탁월한 조정 능력은 금과옥조로 떠받들어도 결코 무리가 없는 귀한 가치라 하겠다.
중국은 물론 북한까지 쌍수를 들어 그의 연임을 환영한다고 하니 그가 국제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하다.
다시한번 반총장의 연임에 갈채를 보낸다.
더불어 우리에게도 세대간 갈등의 고리를 풀어내고 좀 더 살만한 세상으로 안내해주는 불세출의 지도자가 나오길 기대한다.

(2011. 6. 23)
....홍문종 생각

2011년 6월 12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아버지

아버지


내게 있어 아버지는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는 산 같은 존재였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특히 더 했다.
부자지간의 다정다감한 대화는커녕 그저 어렵고 두려웠던 기억이 더 크게 각인돼 있다.
기골이 장대한 외모에서 풍기는 위화감 탓도 있었지만 감정표현이 거의 없던 아버지 특유의 무뚝뚝함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아마도 이 땅의 아들들 대부분이 한번쯤 느끼게 되는 좌절감이라는 생각이다.
조금만 더 하면 아버지를 따라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아무리 죽어라 달려도 번번이 저만치 앞에서 뚜벅뚜벅 걷고 있는 아버지의 완강한 뒷모습을 통해 전해지는 패배감에 시달렸던 기억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장성한 이후 아버지로부터 몇 차례 인생고백을 들으면서 상당 부분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아버지는 시대적 상황의 희생양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월남하셨다. 그런 아버지가 ‘아버지 역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아버지의 기억엔 한없이 근엄하시기만 했던 어린 시절 할아버지(아버지의 아버지)가 전부일텐데 자식 사랑을 살갑게 표현하는 방법을 알 리 만무다. (부전자전인지 나 역시도 아이들에게 그다지 자상한 아버지의 본을 보여주지 못했다)

- 故김학수 화백님,  前교육인적자원부장관 안병영님, 
前연세대총장 故박대선 선생님과 함께-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다.
내 삶의 고비마다 변함없는 모습으로 듬직하게 뒷배가 되어 주셨던 이도 아버지셨다.
특히 당신이 솔선수범하시면서 훈육하셨던 몇 가지 가르침은 지금도 내 인생에 있어 확실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창씨개명을 거부한 탓에 정식학교에 등록 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자신의 품 속 깊숙이 넣어둔 아픔을 통해 교육의 중요성을 새겨 주셨다.
약간의 한학 교육을 마친 아버지는 교회에서 만든 평화 중학교를 (정식인가된 학교는 아니었지만 열성적인 선생님들 덕분에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분들 중 한분은 연세대 총장을 지내신 박대선 선생님이었고, 또 다른 맨토이셨던 김학수 선생님과는 작고하신 작년까지 오래도록 교분을 이어가셨다.) 다녔는데 그나마 당시 일본 순사와의 갈등으로 도피 차 남하하느라 학업을 접어야 했다. 남한에서 경희대학교 법학과에 진학, 학업의 기회를 잡았지만 이마저도 전쟁 통에 1년 다니고 졸업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아버지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학업에 대한 열망을 채우기 위한 노력을 잊지 않으셨다.
얘기들은 하버드에서 공부 때문에 한창 방황하고 있을 때 미국까지 찾아오신 아버지께 들었다. 그 때 아버지는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당신이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며 열심히 하라는 격려를 덧붙이셨는데 내게 있어 그 어떤 교육보다 효과적인 교육이 되었다.


- 제11대 국회의원시절 워싱턴을 방문하신 아버지와 함께 -

아버지의 산교육이 빛을 발했던 또 다른 기억은 국회의원에 낙선할 때다.
아버지께서는 여러 가지 석연치 않은 공천 잡음 속에서 출마여부를 고민하고 있는 나를 부르시더니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던 당신의 경험(아버지는 11,12대 국회의원을 지내셨다)을 들려주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 때 나는 출마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정치 환경이 지금보다 훨씬 위험했기 때문이다. 가장으로서 내가 잘못됐을 때 나나 내 가정을 지킬 사람이 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생각을 굴뚝 같았지만 출마를 포기했다. 그러나 너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출마해라. 왜냐하면 아버지인 내가 있으니까. 아버지는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국회의원이 됐는데 국회의원 아버지를 둔 너는 아버지보다 더 큰 꿈을 가져야 하지 않겠느냐“ 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출마를 독려하시더니 모든 준비는 물론 새벽부터 뛰어다니며 뒷바라지를 해 주셨다. 물론 새벽까지 뛰어주셨다.
그러나 선거결과는 낙선이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네가 질 줄 알았다. 그러나 이번 출마가 앞으로 네가 정치하는 데 있어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라며 담담한 어조로 위로해 주셨는데 그 위로가 지금까지 험난한 정치일정을 버티게 해 주는 자양분이 되고 있다.

아버지의 힘은 수년 전 음해세력(당시 여당 수뇌부가 움직인 정황 등으로 정치적 탄압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몇 가지 사건들)에 의해 학교 총장이었던 아버지와 이사장이었던 내가 동시에 구설수에 오르고 내가 구속된다는 기사가 연일 신문지상에 오르내릴 때에도 어김없이 발휘됐다.
어느 날 문득 내 방을 찾으신 아버지는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 할 때도 떳떳하게 살아온 내가 치욕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비장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학교에 관한 어떤 허물이라도 너는 명목상 이사장 일 뿐이지 책임질 이유가 하나도 없다. 네가 여기서 혹여 아버지와 학교를 위한답시고 경솔하게 행동하거나 발언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최고의 불효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고 당부하셨다.
그러면서 “너는 나를 위해 죽을 수 없지만 나는 너를 위해 죽을 수 있다. 아마 지구상에 유일하게 너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나일 것이다”고 덧붙이시는 아버지를 붙들고 뜨거운 눈물을 흘린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 아버지가 지금 유고 중이시다.
헌정회에서 중국여행을 가셨다가 고령인데다 뜨거운 여름날씨 때문에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놀라서 연락을 드렸더니 아버지는 “나는 아무 일 없으니 학교 방문하는 교육부 손님들 잘 영접하고 학교나 잘 지켜라”며 손사래를 치셨다.
그런데 현지를 통해 알아본 상황은 달랐다.
은근히 아들을 찾으시는 눈치라는 전언이고 보니 그대로 있을 수 없다는 조급함이 일었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안위가 걱정스러워 잠시 후,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현지로 출발할 예정이다.
아버지, 언제든지 손을 내미세요. 예전에 아버지가 제게 해주신 것보다는 듬직함이 덜할지 몰라도 아버지 그래도 최선을 다할게요.
아버지 오래 사세요. 불효자식이지만 누구보다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아버지가 안 계신 세상은 생각하기도 싫다.
벌써부터 하늘이 노래진다.
지금 이 순간,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하나님, 제발 우리 아버지를 지켜주세요.

(2011.6.12)
....홍문종 생각

2010년 11월 13일 토요일

홍문종 생각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지난 일을 추억하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특별한 무엇을 준다.

오늘 하버드 동창회 회장단 일원이 되어 반기문 UN 사무총장을 만난 자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던 바다.

모처럼 만의 해후가 모두를 28년 전으로 되돌려 놓기라도 한 듯 꽃처럼 피어나는 추억담들 속으로 속절없이 빠져드는 모습이었다. 그 바람에 촘촘하게 짜인 반총장의 뒷 일정이 30분 지연되게 돼 다음 일정 분들께 본의 아니게 결례를 범하고 말았다.


돌아보면 하버드 재학시절부터 확실히 반 총장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매사 최선을 다하는 그의 성실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도 적지 않다.

그의 ‘오늘’이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버드 광장에는 조그만 은행이 있었는데 그 은행 안에는 늘 만국기가 펄럭였다. 어느 날 우연히 그 곳에 갔다가 우리 태극기가 만국기 대오에서 빠져있는(82년 당시의 미약한 대한민국 국력을 말해주던 정황이었는지 모르겠다) 상황을 발견한 나는 그 즉시 외교부 과장 신분이었던 반 총장님을 학교에서 만났다. 그리고는 농반 진반으로 외교를 잘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며 태극기의 부재를 告했다.

아무리 찾아도 태극기를 구할수 없다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은행에 태극기를 등장시켰다.

아무래도 그때 그 태극기는 그가 손수 만든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는 우리들에게 이번 G20 정상회의이 대체로 성공적이라는 논평을 내놓았다. 특별히 그동안 G20이 아프리카 등 빈곤국을 위한 배려하는 부분이 없었는데 경제회복이 가난한 나라의 등을 밟고 일어서는 결과를 초래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에서 유엔과 한국이 개도국을 위한 아젠다를 삽입한 점이 돋보인다는 설명이었다. 개도국과 기후문제를 위한 아젠다는 대한민국이 의장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됐다며 이명박 대통령에게도 가점을 줬다.

그는 또 자신의 대통령 출마설에 대해서도 출마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입장을 전했다.

대선 출마설이 현재 유엔 사무총장 재임이 유력시 되는 자신에게 자칫 장애물이 될 수 있다며 헛소문이 자신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없게 해 달라는 당부를 남기기도 했다.

어쨌든 반기문 총장의 부지런함과 끈질긴 인내심이 그를 유엔 총장으로 만들었고 재선가도에 파란불을 켜준 일등공신 인 것만은 틀림없다는 생각이다.

남북문제가 어디로 향하게 될지 모르는 이 때 반총장이 유엔을 지키고 있다면 우리에게 얼마나 든든한 일이겠는가 하는 기대감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28년 전, 반총장이 우리 모두에게 해주던 말이 생각난다.

“지금은 아무 때나 만나서 커피도 마시고 밥도 먹을 수 있지만 앞으로 서로가 바빠지게 되면 쉽게 만날 수 없게 될 테니 싼 값으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지금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지금 현실을 보니 예언처럼 딱 들어맞는 말이 됐다.

그래도 그가 외교안보수석, 오스트리아 대사, 유엔총영사 등 요직을 거칠 때만 해도 해당 국가를 찾아가거나 청와대를 방문해서 정을 다지며 28년 전의 유쾌한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UN 사무총장이 되면서부터는 만나는 일조차 쉽지 않게 된 것만 봐도 그의 예언은 정확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연배는 다르지만 반듯하게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반총장이 한없는 애정과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당시 그를 비롯한 많은 이들과 함께 했던 지난 날의 추억도 못지않게 소중한 나의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만남은 이국 땅에서 하버드 교정을 터전 삼아 저마다의 꿈을 키우던 사람들이 28년 만에 저마다 성장한 모습으로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는 데 큰 의미를 둘 수 있을 것 같다.

누구는 UN 사무총장으로, 누구는 국회의원으로, 또 누구는 대학 총장으로, 누구는 기업가로...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현재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느 시점에선가 다시 만나게 될 때 모두의 모습이 또 어떻게 변해 있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내 마음 속에도 오래 전부터 갈무리 해 놓은 ‘ 꿈’ 하나가 있다.

언제나 현재 진행 중인 너무도 소중한 나와의 약속이다.

꺼내보니 여전히 펄떡거리며 살아있어 다행이다.

조금만 기다려라.



(2010. 11. 13)
.....홍문종 생각



2010년 10월 4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버선목도 아니고

버선목도 아니고



15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 당시 학력시비에 휘말린 적이 있다.

스탠포드 박사 수료와 하버드 석박사로 기재된 나의 학력이 허위라고 상대 후보가 선관위에 제소를 한 것이다. 선거 일주일을 남겨두고 벌어진 일이라 무척이나 곤혹스러웠다.

열 일 제쳐두고 선관위에 불려나가 일일히 해명을 해야했는데 속내를 버선목처럼 까 보일 수도 없어서 답답했다. 해명이 안되면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각 투표소마다 ‘허위학력 기재자’로 방이 붙을 판이어서 바쁘다고 무시할 상황이 아니었다.

촌각을 다투는 와중에 이를 해명하느라 지체되는 시간이 아까워 애를 태우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이는 미국대학 시스템에 문외한이었던 상대후보의 무지로 인한 해프닝이었다.

나는 하버드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마치고 난 뒤 스탠포드에서 박사학위 전 과정을 이수했으나 논문을 제출하지 못해서 수료에 그쳤다. (이는 자동 석사 학위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스탠포드에서의 학력은 ‘석사 및 박사학위 수료’가 맞다) 그리고 이후 하버드로 옮겨가서 박사학위를 마쳤다. 그러나 보니 나의 경우 석사학위는 하버드 행정대학원에, 박사학위는 스탠포드 교육대학원에 각각 적을 두게 되는 특이한 케이스가 됐다. 하버드에서는 석사학위를, 스탠포드에서는 박사학위 수료증명서를, 다시 박사학위는 하바드에서 밖에 뗄 수 없었으니 이 복잡해 보이는 학력이 선거 기간 중 꼬투리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던 사람들에게 호재거리가 되고 만 것이다.



스탠포드 학력 시비로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 가수 타블로 사건을 접하니 그 때 일이 절로 떠오른다.

타블로와 그의 팬을 자처하는 이들이 벌이고 있는 갑론을박도 비슷한 현상이 아닐까 싶다.

솔직히 타블로에 대해 사전 지식이 많은 건 아니다. 다만 이번 사건 정도가 타블로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스탠포드 영문학 석사를 입증하는 성적증명서를 비롯한 각종 증빙자료가 제출된 것으로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블로의 학력 논란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신정아 사건 이후 허위학력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고조되고 있다지만 타블로의 경우는 지나치다. ‘마녀사냥’이 따로 없다. 급기야 '타진요'라는 까페까지 등장해 집단으로 타블로 비난에 열을 올리고 있는 상황으로까지 진전된 형국이다



타블로는 왜 이렇게 집요한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우리 사회를 에워싸고 있는 학벌만능주의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의 모든 길은 로마가 아니라 ‘학벌’로 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 간 서열이 존재하고 출신대학이 사회적 지위를 갖게 하는데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그것이 엄연한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스탠포드라는 미국 아이비 리그 대학 출신의 인기가수에 대한 대중의 뒤틀린 관심이 무리수를 둔 결과가 아닌가 싶다.

그가 만약 스탠포드가 아닌 평범한 대학 출신이었다면 지금같은 사회적 파장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명문대 출신이라는 배경이 타블로의 가수 인생에 막대한 플러스 알파를 부여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를 용납하고 싶지 않은 '반감'이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학벌은 한 개인이 살아온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평가할 만큼 절대적 가치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오로지 학력만이 인생 최고 가치라며 생의 전부를 ‘올인’하는 분위기다. 이 때문에 진정한 삶의 과정을 맛보지 못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여러 번 강조한 바 있지만 진짜 실력이 인정받는 실력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특정 대학 졸업장에 더해지는 유무형의 플러스 알파를 최소화 할 수 있어야겠다.


특히 최근 물의를 빚고 있는 특권층 자녀들의 특혜 취업 시비도 이참에 근절시켜야 하겠다. 취직 뿐 아니라 교육 등 다양한 방면에서 혜택을 누려왔던 그들의 도덕 불감증에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국내 유수대학 입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경제적 교육적 상대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 자료 역시 위기에 처한 우리사회의 단면을 드러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공정한 사회는 말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실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더 이상 연고주의에 기대거나 조장하는 사람들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건실한 사회적 풍토조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다.

그러러면 불편법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한 사람들이 몰염치했던 행각을 고하고 사죄를 구하는 철저한 자기 반성부터 선행돼야겠다는 생각이다.



언젠가 명문대 출신이라고 속인 사기꾼에게 여성들은 결혼하자고 몰려들고 학부모들은 자식들 과외 청탁하려 몰려들고 중매쟁이들은 중매서겠다고 문전성시를 이뤘다는 기사를 보고 입맛이 썼던 기억이 난다.

명문대생이라고 하면 사족을 못쓰고 부나비처럼 몰려드는 어리석은 군상들의 모습을 한두번 보는 게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타블로 학력시비는 고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다. 비뚤어진 대중의 가치관이 초래한 후유증처럼 여겨져 불편하기 짝이 없다.

이래서는 안된다. 사회적 에너지가 제대로 방향을 잡을 수 있어야겠다.

진짜 실력이 인정받는 참된 공정이 뿌리내리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다 함께 힘을 모으자.


(2010.10.4)
....홍문종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