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를 회복해야
중국 당국이 산업화로 야기된 사회적 부작용에 적극 대응하는 모습이다.
5년 안에 효자 100만 명 만들기 운동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는 각종 패륜 범죄를 퇴치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인데 오죽하면 그런 방안까지 내놓게 됐을까 싶다.
중국의 고심이 단순한 남의 일로만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 역시 비슷한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 주변에도 패륜범죄가 그 검은 뿌리를 내린 지 오래다.
부모를 때리고 심지어 살해까지 하는 충격적인 극단의 패륜행각이 드물지 않다. 노인공경의 미풍양속도 빠른 속도로 그 당위성을 상실해가는 모습이다. 더 충격적인 건 붕괴된 교권이 목도되는 교육현장이다. 학생이 교사를 폭행과 희롱의 대상으로 삼는 사건이 더 이상 놀랍지 않을 만큼 만연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며칠 전만 해도 여중생이 교사의 머리채를 잡았다는 보도가 있었다.
물질만능주의와 지나친 경쟁 환경이 초래한 우리시대의 슬프고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됐을까 참담한 심정이다.
부모에 대한 효가 최대의 가치로 존중받고 스승이 무한한 존경과 신뢰의 대상이었던, 장유유서의 사회적 규범이 소통의 통로가 되어 중심을 잡아주던 시절에는 꿈에도 생각 못할 사건 사고들이 날마다 넘치고 있다. 풍요로운 물질에도 불구하고 해소되지 않는 갈증이 인간을 성마르게 몰아간 결과와 무관하지 않다. 부모에게 자식이, 스승에게 제자가, 어른에게 어린 사람들이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믿기지 않는 현실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렇게 우리 사회에서 어른의 가르침이 사라지고 있는 건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봉변이 두려워 부당한 행실을 지적하고 바로잡아야 할 훈육이 그 역할을 포기하면서 기존 규범의 가치를 무너뜨리고 있다.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교사를 다스리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는 지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일단은 문제 학생을 피하고 보자는 처세가 대세를 이루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식의 몫으로 당연시 되던 부모 부양도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부모가 자식을 상대로 ‘생활비를 달라’고 소송을 제기하는 가슴 아픈 세태와 마주치게 되는 현실이 그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점차적으로 권위가 상실되는 사회적 역할이 컸다.
정보통신 발달은 지식이 더 이상 어른들만의 고유 영역이기를 허용하지 않았다. 웹 검색 기술이 지식의 보유량을 결정짓는 주요 수단이 되면서 어른 보다 ‘똑똑한 아이들’을 양산하는 창구가 됐다. 상대적으로 ‘무식한 어른’이 경륜의 권위에 묻어가는 무임승차가 봉쇄되기도 했다.
권위의 실종은 더 이상 존중받을 수 없다는 신뢰 상실의 판정을 의미한다.
주변에서도 단 한 번의 실수로 추풍낙엽 신세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만큼 엄격한 잣대가 준용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인기 절정의 강호동이 탈세혐의로 정상의 자리를 내놓게 된 것도 그에게 부여된 권위를 지키지 못한 반작용의 여파라고 할 수 있다.
권위의 결벽적인 속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패륜을 비롯한 반사회적 행각들은 반드시 바로잡혀야 할 대상이다.
그 중 권위의 신뢰 회복은 빼놓을 수 없는 실천적 요소로 구성원 저마다의 책무의식에 대한 소명감이 그 해법이 아닐까 싶다. 모든 문제점을 남탓에서 출발할 게 아니라 무조건 스스로를 탓하는 관점으로 시작한다면 의외로 수월하게 답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인간은 어차피 서로의 관계 속에서 각자의 삶을 영위하는 사회적 동물이다. 그러나 인간의 개성이나 창의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최소한의 질서조차 희화화하는 행위를 영웅시 하는 풍조는 지양해야 할 것이다. 반면,
최대한 많은 이들의 자유와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선 개인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법도나 금도의 세심한 역할이 막중하다. 그렇지 못할 경우 흐트러진 사회가 될 것이고 그 흐트러진 한 부분이 사회의 전체 기반을 흔드는 결정타가 될 수도 있음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인구 밀도가 높고 개인의 욕구가 다른 사람과 상충될 가능성이 많은 상황일수록 기본적인 공공질서에 대한 관심은 아무리 많아도 결코 부족하지 않다.
서로를 존중하며 사라진 권위를 회복하자,
단 조급증은 치명적인 독약임을 명심할 일이다.
(2011. 11. 8)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8일 화요일
2011년 11월 6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운수 좋은 날
운수 좋은 날
살다보면 의외에 곳에서 저마다의 ‘허식’을 무너뜨리는 진리와 맞닥뜨릴 때가 있다.
아마도 오늘의 경험이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세속적인 욕심을 쫓다 보면 본의 아니게 본질을 호도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나 유권자의 표심에서 자유롭지 않은 정치인의 입장에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할 수 밖에 없다. 삶의 질 차원에서 정치관련 직업군이 높은 평점을 받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삶은 ‘고품질’로 자랑할 만하다.
모처럼 횡재한 기분이 들만큼 만족스런 일과였다.
두 곳의 일정을 통해 선물처럼 받은 ‘깨달음’ 때문이다.
당초 그곳을 인도한 사람들의 의도와는 다른 결론이었지만 내 자신에게도 평화를 주는 양질의 시간이 됐다.
양로원을 찾았다.
명색은 외로운 노년의 삶을 위로해드리겠다는 것이었지만 정작 어르신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속내가 따로 있는 방문이었다.
그러나 해맑은(?) 표정으로 우리 일행을 반기는 모습을 뵙는 순간 가슴에 파동이 일었다. 세월의 굴곡을 고스란히 담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기뻐하시는 모습에 그동안 선거 때마다 표를 얻고자 어르신들을 현혹했던 지난 행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말로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궈낸 주역이라고 추켜세웠으면서 얼마나 그에 걸 맞는 대접을 해드렸나를 생각하니 부끄럽고 죄스런 마음에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순식간에 양심의 기운이 내 마음을 지배했다.
그래서 욕심을 내려놓고 진심으로 어르신들을 위한 시간을 보냈다.
크게 많은 것을 해드릴 수 없었지만 천진난만한 마음으로 어르신들과 코드를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분들이라는 생각을 접고 가없는 희생으로 우리의 오늘을 이룩하신 노고에 대해 진심어린 마음으로 감사를 전했다.
그리고 수능을 앞두고 부모님들이 밤새워 기도하는 곳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이 역시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결례를 무릅쓰고 찾게 된 곳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마음을 정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됐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대낮처럼 밝은 공간엔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들어찬 사람들이 저마다 소원하는 바를 뇌는 소리가 산 전체를 울리고 있었다. 순간 아차 싶었지만 어차피 온 거 한번 부딪혀 보자 하는 심정으로 비집고 들어섰는데 누구도 일별을 주지 않았다. 하기야 자식의 수능을 위한 기원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안중에 없는 그들 앞에서 얼쩡거리려고 했던 자체가 무모한 일이었다.
잠시 어떻게 처신할지 몰라 멀거니 서 있다가 그들의 기도하는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이 두 일정은 세속적 관점으로 보면 들인 공에 비해 별반 효과를 내지 못한 평점 이하의 투자였다. 그러나 뭔가 가슴을 가득 채우는 듯한 뿌듯한 행복감과 해탈의 경지에라도 이른 듯한 포만감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깨달음을 안겨줬다. 모처럼 실속 있는 삶의 주인이 된 만족감까지 생각한다면 이윤이 큰 장사(?)를 한 셈이다.
자신의 이득이나 기쁨이 아닌 오로지 타인을 위한 정성은 그 상대가 국가와 민족이 됐건 자기 자식이 됐건 그 숭고하고 진지한 열정 앞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특히 이들의 이타적인 삶은 입만 열면 이타적인 삶은 물론 국가와 민족 그리고 후대를 위한 미래를 부르짖는 정치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을 했다.
정치인들이 최소한 이들만큼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정성을 쏟았다면 분명 세상의 많은 것들이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정치권의 솔직한 반성이 절실해진다.
정치권의 진심어린 반성이 허공에 흩어진 수많은 약속들을 제 자리에 돌려놓을 수 있다면 모든 이들의 삶도 그만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오늘 깨달은 이 진리가 잠자리에 드는 이 순간을 더 없이 행복하게 한다.
따뜻한 기운이 내 가슴에 별처럼 쏟아지는 느낌이다.
(2011. 11. 5)
....홍문종 생각
살다보면 의외에 곳에서 저마다의 ‘허식’을 무너뜨리는 진리와 맞닥뜨릴 때가 있다.
아마도 오늘의 경험이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세속적인 욕심을 쫓다 보면 본의 아니게 본질을 호도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나 유권자의 표심에서 자유롭지 않은 정치인의 입장에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할 수 밖에 없다. 삶의 질 차원에서 정치관련 직업군이 높은 평점을 받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삶은 ‘고품질’로 자랑할 만하다.
모처럼 횡재한 기분이 들만큼 만족스런 일과였다.
두 곳의 일정을 통해 선물처럼 받은 ‘깨달음’ 때문이다.
당초 그곳을 인도한 사람들의 의도와는 다른 결론이었지만 내 자신에게도 평화를 주는 양질의 시간이 됐다.
양로원을 찾았다.
명색은 외로운 노년의 삶을 위로해드리겠다는 것이었지만 정작 어르신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속내가 따로 있는 방문이었다.
그러나 해맑은(?) 표정으로 우리 일행을 반기는 모습을 뵙는 순간 가슴에 파동이 일었다. 세월의 굴곡을 고스란히 담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기뻐하시는 모습에 그동안 선거 때마다 표를 얻고자 어르신들을 현혹했던 지난 행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말로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궈낸 주역이라고 추켜세웠으면서 얼마나 그에 걸 맞는 대접을 해드렸나를 생각하니 부끄럽고 죄스런 마음에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순식간에 양심의 기운이 내 마음을 지배했다.
그래서 욕심을 내려놓고 진심으로 어르신들을 위한 시간을 보냈다.
크게 많은 것을 해드릴 수 없었지만 천진난만한 마음으로 어르신들과 코드를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분들이라는 생각을 접고 가없는 희생으로 우리의 오늘을 이룩하신 노고에 대해 진심어린 마음으로 감사를 전했다.
그리고 수능을 앞두고 부모님들이 밤새워 기도하는 곳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이 역시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결례를 무릅쓰고 찾게 된 곳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마음을 정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됐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대낮처럼 밝은 공간엔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들어찬 사람들이 저마다 소원하는 바를 뇌는 소리가 산 전체를 울리고 있었다. 순간 아차 싶었지만 어차피 온 거 한번 부딪혀 보자 하는 심정으로 비집고 들어섰는데 누구도 일별을 주지 않았다. 하기야 자식의 수능을 위한 기원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안중에 없는 그들 앞에서 얼쩡거리려고 했던 자체가 무모한 일이었다.
잠시 어떻게 처신할지 몰라 멀거니 서 있다가 그들의 기도하는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이 두 일정은 세속적 관점으로 보면 들인 공에 비해 별반 효과를 내지 못한 평점 이하의 투자였다. 그러나 뭔가 가슴을 가득 채우는 듯한 뿌듯한 행복감과 해탈의 경지에라도 이른 듯한 포만감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깨달음을 안겨줬다. 모처럼 실속 있는 삶의 주인이 된 만족감까지 생각한다면 이윤이 큰 장사(?)를 한 셈이다.
자신의 이득이나 기쁨이 아닌 오로지 타인을 위한 정성은 그 상대가 국가와 민족이 됐건 자기 자식이 됐건 그 숭고하고 진지한 열정 앞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특히 이들의 이타적인 삶은 입만 열면 이타적인 삶은 물론 국가와 민족 그리고 후대를 위한 미래를 부르짖는 정치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을 했다.
정치인들이 최소한 이들만큼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정성을 쏟았다면 분명 세상의 많은 것들이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정치권의 솔직한 반성이 절실해진다.
정치권의 진심어린 반성이 허공에 흩어진 수많은 약속들을 제 자리에 돌려놓을 수 있다면 모든 이들의 삶도 그만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오늘 깨달은 이 진리가 잠자리에 드는 이 순간을 더 없이 행복하게 한다.
따뜻한 기운이 내 가슴에 별처럼 쏟아지는 느낌이다.
(2011. 11. 5)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4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싼 게 비지떡이다
싼 게 비지떡이다
의정부 발곡중학교에서 특강을 했다.
‘청소년이여 세계로 나아가라!!’을 주제로 2시간 동안 진행됐는데 학생들이 열심히 받아들이는 분위기여서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신명이 났다. 특히 강의를 하는 동안 과거 은사님들과 함께 했던 시간이 오버랩 되는 환타지 체험은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을 안겨줬다.
그 옛날 은사님들의 가르침이 강단에 선 현실의 나를 관통하거나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려져 은사님의 가르침을 받고 있거나 또 은사님들이 나를 대신해 현재의 강의를 이끌어가는 식의 장면들이 4차원 형태의 어울림이 꿈 인듯 생시 인듯 객관화 된 현실을 잇고 있었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면서 추억을 부르고 있었다.

의정부 발곡중학교 전경영 교장선생님, 고혜숙 교감선생님
열심히 강의를 듣는 발곡중학교 학생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만나고 헤어졌다.
대부분 훌륭한 분들이셨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 중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이해하고 나의 가치를 발견해 독려하시던 몇 몇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조금은 더 특별하게 남아있다. 그 때의 선생님들이 내게 주시던 눈빛과 가르침은 아마도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다. 내 경우엔 선생님의 따뜻한 관심이 신뢰받는다는 안정감을 심어줬고 세상의 모든 불가능을 가능하도록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환치됐다.
과거 세대의 학교 환경은 요즘 세대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딱딱하고 무거운 분위기였다.
그런 환경 속에서 천방지축이었던 나를 알아봐 주고 보듬어주는 선생님의 손길이 아니었다면 그 끔찍하고 정형화된 어둠의 터널을 통과할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다.
숨 막히는 억압이 ‘청춘의 붉은 피’를 사정없이 짓누르던 시절의 이야기다.
과거에 비해 다양해진 관심사에도 불구하고 교육 여건은 갈수록 험악해지는 추세다.
무한대의 감각을 소유한 요즘 세대에 뭔가를 쥐어주는 식의 교육 형태는 무리수 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에게 생각의 빌미를 제공하고 취사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리게 되는 건 교육일선에 있는 대다수 선생님들의 공통된 고민일 것이다.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교육현장도 녹록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실제로 PC 등 지식전달의 매개체나 반값 등록금, 학생 해방 등 좋은 정책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지만 정작 좋은 스승을 만나기는 더 많이 어려워졌다.
교육 문제를 뭔가 분석하고 해결하고 대책을 수립하는 데 중점을 두는 인간의 문제 해결 측면보다 사제가 하나가 되어 서로를 온전하게 수용하기 위해 노력할 때 더 좋은 결실을 기대할 수 있을텐데 쉽지 않다.
우리 교육의 장래가 걱정되는 이유다.
세대를 불문하고 ‘스티브 잡스’를 외쳐대는 시대다.
그렇게 법석을 떨고 있지만 정작 우리 사회가 ‘스티브 잡스 캐릭터’에까지 포용과 관용의 여유를 보이고 있는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사생아, 문제아, 대학중퇴자, 직장 퇴출자... 이런 무시무시한 용어로 설명되는 삶이 온전하게 버텨낼 수 있기엔 넘어야 할 관습의 벽이 아직은 너무 높다.
인생 전반에 걸쳐 예사롭지 않은 삶을 구가했던 그다.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둔 ‘스티브 잡스’였기에 가능한 일이지 미완의 스티브 잡스를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일은 도통의 경지에 이른 인내심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측면에서 학생 개개인의 특성을 인정해주고 저마다의 개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 주는 역할이야말로 좋은 교육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반값 등록금 문제만 해도 그렇다.
교사가 공공연히 학생이나 학부모에게 폭력을 당하는 사건이 하루건너 발생하고 있다.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그저 참담할 뿐이다.
지옥이 따로 없다.
이 지옥이 반값 등록금이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고 있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더 없이 숭고해야 할 사제지간이나 학교와 학부모 사이가 반목과 오해로 얼룩지게 만드는 모종의 역할이 진행된 결과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정제되지 않은 편향된 시각으로 매도하는 각종 미디어의 무성의가 교수와 학생, 학부모와 학생, 그리고 학교와 정부 사이의 불신을 양산하고 이간질로 이어지는 현실이 솔직히 야속하다.
자본의 논리가 아니더라도 반값이 무조건 좋은 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고있는 사실 아닌가.
(2011. 11.4)
....홍문종 생각
의정부 발곡중학교에서 특강을 했다.
‘청소년이여 세계로 나아가라!!’을 주제로 2시간 동안 진행됐는데 학생들이 열심히 받아들이는 분위기여서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신명이 났다. 특히 강의를 하는 동안 과거 은사님들과 함께 했던 시간이 오버랩 되는 환타지 체험은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을 안겨줬다.
그 옛날 은사님들의 가르침이 강단에 선 현실의 나를 관통하거나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려져 은사님의 가르침을 받고 있거나 또 은사님들이 나를 대신해 현재의 강의를 이끌어가는 식의 장면들이 4차원 형태의 어울림이 꿈 인듯 생시 인듯 객관화 된 현실을 잇고 있었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면서 추억을 부르고 있었다.

의정부 발곡중학교 전경영 교장선생님, 고혜숙 교감선생님
열심히 강의를 듣는 발곡중학교 학생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만나고 헤어졌다.
대부분 훌륭한 분들이셨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 중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이해하고 나의 가치를 발견해 독려하시던 몇 몇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조금은 더 특별하게 남아있다. 그 때의 선생님들이 내게 주시던 눈빛과 가르침은 아마도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다. 내 경우엔 선생님의 따뜻한 관심이 신뢰받는다는 안정감을 심어줬고 세상의 모든 불가능을 가능하도록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환치됐다.
과거 세대의 학교 환경은 요즘 세대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딱딱하고 무거운 분위기였다.
그런 환경 속에서 천방지축이었던 나를 알아봐 주고 보듬어주는 선생님의 손길이 아니었다면 그 끔찍하고 정형화된 어둠의 터널을 통과할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다.
숨 막히는 억압이 ‘청춘의 붉은 피’를 사정없이 짓누르던 시절의 이야기다.
과거에 비해 다양해진 관심사에도 불구하고 교육 여건은 갈수록 험악해지는 추세다.
무한대의 감각을 소유한 요즘 세대에 뭔가를 쥐어주는 식의 교육 형태는 무리수 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에게 생각의 빌미를 제공하고 취사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리게 되는 건 교육일선에 있는 대다수 선생님들의 공통된 고민일 것이다.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교육현장도 녹록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실제로 PC 등 지식전달의 매개체나 반값 등록금, 학생 해방 등 좋은 정책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지만 정작 좋은 스승을 만나기는 더 많이 어려워졌다.
교육 문제를 뭔가 분석하고 해결하고 대책을 수립하는 데 중점을 두는 인간의 문제 해결 측면보다 사제가 하나가 되어 서로를 온전하게 수용하기 위해 노력할 때 더 좋은 결실을 기대할 수 있을텐데 쉽지 않다.
우리 교육의 장래가 걱정되는 이유다.
세대를 불문하고 ‘스티브 잡스’를 외쳐대는 시대다.
그렇게 법석을 떨고 있지만 정작 우리 사회가 ‘스티브 잡스 캐릭터’에까지 포용과 관용의 여유를 보이고 있는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사생아, 문제아, 대학중퇴자, 직장 퇴출자... 이런 무시무시한 용어로 설명되는 삶이 온전하게 버텨낼 수 있기엔 넘어야 할 관습의 벽이 아직은 너무 높다.
인생 전반에 걸쳐 예사롭지 않은 삶을 구가했던 그다.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둔 ‘스티브 잡스’였기에 가능한 일이지 미완의 스티브 잡스를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일은 도통의 경지에 이른 인내심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측면에서 학생 개개인의 특성을 인정해주고 저마다의 개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 주는 역할이야말로 좋은 교육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반값 등록금 문제만 해도 그렇다.
교사가 공공연히 학생이나 학부모에게 폭력을 당하는 사건이 하루건너 발생하고 있다.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그저 참담할 뿐이다.
지옥이 따로 없다.
이 지옥이 반값 등록금이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고 있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더 없이 숭고해야 할 사제지간이나 학교와 학부모 사이가 반목과 오해로 얼룩지게 만드는 모종의 역할이 진행된 결과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정제되지 않은 편향된 시각으로 매도하는 각종 미디어의 무성의가 교수와 학생, 학부모와 학생, 그리고 학교와 정부 사이의 불신을 양산하고 이간질로 이어지는 현실이 솔직히 야속하다.
자본의 논리가 아니더라도 반값이 무조건 좋은 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고있는 사실 아닌가.
(2011. 11.4)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3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정치야 연기야?
정치야 연기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처리를 둘러싸고 꼼수를 부리고 있는 정치권 행태가 개탄스럽다. 입으로는 국익을 말하면서도 실상은 당리당략이나 정치적 표 계산에 급급한 움직임들 뿐이다. 중차대한 국가 대사를 명분 없는 정쟁의 수단으로 떨어뜨려 놓고도 별다른 가책도 없어 보인다. 특히 FTA 비준 반대의 선봉에 나선 야당의 경우, 그 정도가 더 심하다 할 것이다. 원칙도 명분도 없이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있다는 혐의가 짙다.
한미 FTA를 야권 통합의 지렛대로 삼고 있는 민주당 손학규 대표만 해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내가 알기로 그는 분명 ‘찬성파’였다. 그것도 당론과 다른 ‘찬성’이어서 ‘위대한 결단’ 어쩌고 하며 주목을 받기도 했다. 도당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도지사였던 그와 어울릴 기회가 많았는데 FTA 당위성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당내 비준파를 제치고 다른 야당과 한 목소리를 내며 ‘결사항전’을 외치고 있다. 입장을 달리하게 된 그 어떤 해명도 없이 말이다.
정치를 하는 건지 연기를 하는 건지 헷갈리게 하는 정치인들이 많다. 카메라만 돌아가면 이해 안되는 돌발행위로 온 몸을 던지며 국민에게 존재감이 알려지길 원하는 무리들이 반드시 있다.
당내 입지가 취약한 초선의원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오류 중 하나다.
더구나 지금쯤이면 내년 총선을 앞두고 많은 정치인들이 복잡한 셈법이 시작되는 시기다.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면 지금부터 어떤 말과 행동으로 스탠스를 정해야 할지, 유권자의 표심을 사로잡으려면 어떤 퍼포먼스가 적당할지 오로지 자나 깨나 그 궁리뿐일 것이다.
그런 만큼 국익을 배려한 판단이나 거시적 안목이 고려된 결정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하지만 포퓰리즘 발상으로 준비한 선거 구호나 단상에서의 화려하고 과장된 몸짓들은 오히려 역풍을 불러올 때가 많다. 스스로를 옥죄는 족쇄가 되어 난감한 처지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단기적인 이익이나 미래 이익의 절묘한 규합을 통해 유지되는 게 정치의 기본적 속성이라면 지나친 인기영합 발언이나 과격하고 튀는 행동이 가져다 줄 이익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이번 FTA 처리과정에서도 얼굴 알리기 용도로 이 방법을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사정이야 눈물겹지만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바란다. 무엇보다 국가의 중대사를 사적 이익을 취하기 위한 들러리로 전락시키는 건 국회의원으로 할 짓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이를 자제하는 것이 옳다. 21세기 한국사회에 필요한 선량이 되려면 최소한 국가와 국민을 앞세우고 소중히 배려할 줄 아는 매너부터 갖춰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한미 FTA 비준안의 조속한 처리가 답이라고 생각한다.
선택의 여지가 그다지 많지 않다. 이렇다 할 부전자원 없이 수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최대 교역국인 미국과의 FTA 체결을 피할 도리가 없지 않을까 싶다.
인위적이더라도 생산적인 노력으로 비준안이 원만하게 처리되길 바란다.
국회를 배려하는 청와대의 성실한 노력이 해법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FTA 만큼은 반대하는 쪽이나 찬성하는 쪽이나 당당하고 떳떳하게 명분을 잃지 않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행여 지난 연말처럼 단상을 점거하고 끌어내리고 방망이를 뺏고 하는 아수라장을 전 세계에 중계하는 불상사가 재현될까 솔직히 불안하다. 이번 처리 과정에서 또 다시 정치권 구태가 반복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정당정치의 존립자체를 부정하려 드는 국민들에게 영원히 버림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할 일이다.
FTA가 제대로 처리돼 그나마 제대로 한 일이 별로 떠오르지 않는 18대 국회의 체면을 세워주는 업적이 되길 바란다.
(2011. 11. 3)
....홍문종 생각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처리를 둘러싸고 꼼수를 부리고 있는 정치권 행태가 개탄스럽다. 입으로는 국익을 말하면서도 실상은 당리당략이나 정치적 표 계산에 급급한 움직임들 뿐이다. 중차대한 국가 대사를 명분 없는 정쟁의 수단으로 떨어뜨려 놓고도 별다른 가책도 없어 보인다. 특히 FTA 비준 반대의 선봉에 나선 야당의 경우, 그 정도가 더 심하다 할 것이다. 원칙도 명분도 없이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있다는 혐의가 짙다.
한미 FTA를 야권 통합의 지렛대로 삼고 있는 민주당 손학규 대표만 해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내가 알기로 그는 분명 ‘찬성파’였다. 그것도 당론과 다른 ‘찬성’이어서 ‘위대한 결단’ 어쩌고 하며 주목을 받기도 했다. 도당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도지사였던 그와 어울릴 기회가 많았는데 FTA 당위성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당내 비준파를 제치고 다른 야당과 한 목소리를 내며 ‘결사항전’을 외치고 있다. 입장을 달리하게 된 그 어떤 해명도 없이 말이다.
정치를 하는 건지 연기를 하는 건지 헷갈리게 하는 정치인들이 많다. 카메라만 돌아가면 이해 안되는 돌발행위로 온 몸을 던지며 국민에게 존재감이 알려지길 원하는 무리들이 반드시 있다.
당내 입지가 취약한 초선의원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오류 중 하나다.
더구나 지금쯤이면 내년 총선을 앞두고 많은 정치인들이 복잡한 셈법이 시작되는 시기다.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면 지금부터 어떤 말과 행동으로 스탠스를 정해야 할지, 유권자의 표심을 사로잡으려면 어떤 퍼포먼스가 적당할지 오로지 자나 깨나 그 궁리뿐일 것이다.
그런 만큼 국익을 배려한 판단이나 거시적 안목이 고려된 결정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하지만 포퓰리즘 발상으로 준비한 선거 구호나 단상에서의 화려하고 과장된 몸짓들은 오히려 역풍을 불러올 때가 많다. 스스로를 옥죄는 족쇄가 되어 난감한 처지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단기적인 이익이나 미래 이익의 절묘한 규합을 통해 유지되는 게 정치의 기본적 속성이라면 지나친 인기영합 발언이나 과격하고 튀는 행동이 가져다 줄 이익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이번 FTA 처리과정에서도 얼굴 알리기 용도로 이 방법을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사정이야 눈물겹지만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바란다. 무엇보다 국가의 중대사를 사적 이익을 취하기 위한 들러리로 전락시키는 건 국회의원으로 할 짓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이를 자제하는 것이 옳다. 21세기 한국사회에 필요한 선량이 되려면 최소한 국가와 국민을 앞세우고 소중히 배려할 줄 아는 매너부터 갖춰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한미 FTA 비준안의 조속한 처리가 답이라고 생각한다.
선택의 여지가 그다지 많지 않다. 이렇다 할 부전자원 없이 수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최대 교역국인 미국과의 FTA 체결을 피할 도리가 없지 않을까 싶다.
인위적이더라도 생산적인 노력으로 비준안이 원만하게 처리되길 바란다.
국회를 배려하는 청와대의 성실한 노력이 해법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FTA 만큼은 반대하는 쪽이나 찬성하는 쪽이나 당당하고 떳떳하게 명분을 잃지 않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행여 지난 연말처럼 단상을 점거하고 끌어내리고 방망이를 뺏고 하는 아수라장을 전 세계에 중계하는 불상사가 재현될까 솔직히 불안하다. 이번 처리 과정에서 또 다시 정치권 구태가 반복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정당정치의 존립자체를 부정하려 드는 국민들에게 영원히 버림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할 일이다.
FTA가 제대로 처리돼 그나마 제대로 한 일이 별로 떠오르지 않는 18대 국회의 체면을 세워주는 업적이 되길 바란다.
(2011. 11. 3)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2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1% vs 99%
1% vs 99%
3개월 넘게 계속되던 태국의 물난리 사태가 진정국면에 접어들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나마 다행이지만 국토의 절반이 물에 잠길 정도로 심각했던 만큼 수마가 남긴 후유증도 만만치 않은 분위기다.
이번 수해가 빌미가 되어 불거진 태국사회의 계층 간 갈등이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다. 우연히 피해 상황을 보여주던 태국 현지의 방송화면을 접하고 난 이후부터다.
천재지변을 당한 같은 현실인데도 카메라에 비친 부자와 빈자의 상황은 너무나 달랐다.
여전히 화려함과 안락함을 이어가고 있는 부자동네 고급 쇼핑몰은 담 너머 홍수 따위는 안중에 없는 듯 건재했고 삽과 곡괭이로 둑(부자동네 안위를 위해 조성된 물길 차단용도의 둑)을 부수며 생존을 위해 나선 빈자의 일그러진 표정에는 분노가 아닌 슬픔이 묻어났다.
같은 나라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이질감이 느껴지는 풍경에서 폭발 직전의 민심이 느껴졌다.
지나친 부의 편중이 사회적 화두가 되어 있는 건 때 이른 폭설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뉴욕이라고 다르지 않다. 반 월가 구호로 시작한 이들 99%의 저항이 점차적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1% 특권층의 탐욕을 위해 99% 대중의 희생을 요구하는 현실을 성토하는 이들의 주장이 공감을 얻으며 전 세계 700여 도시의 민중 봉기로 확산되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이 참에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역할을 다시한번 생각해본다.
앞 선 세대일수록 가진 자의 책무의식이 더 선명하고 실천의지도 더 강하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역사의 자취를 더듬다 보면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정황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 자원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건 영국 최고의 명문학교인 이튼스쿨 학생들이었다.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개인의 목숨은 초개처럼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불문율이었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로마 시대 귀족들도 전쟁이 일어나면 가문을 이을 한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참전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그것이 귀족의 명예를 지키는 길이고 또 반드시 지켜야 할 책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도 만석지기 부자이면서 300년 동안 대를 이어 존경받던 명품 가문이 있다. ‘경주 최 부자집’ 문중인데 흉년에는 가뭄에 농토를 인위적으로 농토를 늘리지 말라는 가르침 등 남다른 가치관으로 후대를 훈육했다. 탐욕을 경계하고 더불어 사는 가치관을 심어준 선대의 특별한 가르침이 최부자집 명성을 이어갈 수 있게 한 비결이 아닐까 싶다.
결국 노블리스 오블리주 실천이 사회를 안정시키고 스스로에게도 엘리트로서 사회적 책무를 다한 존재가치를 인식시키는 순기능으로 거듭난다는 결론이다.
태국사태나 뉴욕의 풍경이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불과 얼마 전 우리에게도 1%의 몰염치를 질타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여의도 광장에 모인 그들의 미약한 시작이 어떤 결론으로 도출될지 지금으로선 누구도 예단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 도처에 깔려있는 1%의 횡포 사례는 반성과 자숙만으로 해결점을 찾기엔 이미 금도를 넘은 느낌이다. 최근 언론 보도를 통해 드러난 재벌회사들의 파렴치한 행각들만 해도 그렇다.
중소기업 생존을 위협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번에는 근로자 노임까지 가로챘다는 혐의다.
재벌기업이 지자체 청소용역 대행 사업에 끼어든 것도 민망한 일인데 노임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다니 할 말을 잃게 한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그렇지 어려운 노동자들의 임금까지 착취했어야 했을까 싶어 부끄러움에 얼굴이 뜨겁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이 불러온 이 서글픈 현장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척결해야 할 과제다.
이런 식으로 어렵고 힘든 이들을 궁지로 몰아가면 그들의 분노가 어디로 향하게 될 지는 너무나 뻔한 일이다. 그들의 분노가 폭풍이 되어버리면 그 때는 수백배 수천배의 대가를 지불하고도 막아내지 못하게 되는 건 불문가지다.
이는 자본주의와의 대결구도에서 패배한 공산주의 몰락을 통해서도 익히 경험한 바다.
각각의 장단점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가 패배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자유에 대한 개념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결과였다는 생각이다.
기득권 계층의 탐욕을 제어할 기능을 갖지 못한다면 대한민국 사회에서의 자본주의 역시 사상누각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이 메시지의 지침대로 스스로는 물론 국가전체를 정갈하게 운용할 수 있는 수 있는 통합의 리더십이 간절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2012년이 다가오고 있어 더욱 더 그런 생각을 하게되는 것 같다.
(2011. 11.2)
....홍문종 생각
3개월 넘게 계속되던 태국의 물난리 사태가 진정국면에 접어들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나마 다행이지만 국토의 절반이 물에 잠길 정도로 심각했던 만큼 수마가 남긴 후유증도 만만치 않은 분위기다.
이번 수해가 빌미가 되어 불거진 태국사회의 계층 간 갈등이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다. 우연히 피해 상황을 보여주던 태국 현지의 방송화면을 접하고 난 이후부터다.
천재지변을 당한 같은 현실인데도 카메라에 비친 부자와 빈자의 상황은 너무나 달랐다.
여전히 화려함과 안락함을 이어가고 있는 부자동네 고급 쇼핑몰은 담 너머 홍수 따위는 안중에 없는 듯 건재했고 삽과 곡괭이로 둑(부자동네 안위를 위해 조성된 물길 차단용도의 둑)을 부수며 생존을 위해 나선 빈자의 일그러진 표정에는 분노가 아닌 슬픔이 묻어났다.
같은 나라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이질감이 느껴지는 풍경에서 폭발 직전의 민심이 느껴졌다.
지나친 부의 편중이 사회적 화두가 되어 있는 건 때 이른 폭설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뉴욕이라고 다르지 않다. 반 월가 구호로 시작한 이들 99%의 저항이 점차적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1% 특권층의 탐욕을 위해 99% 대중의 희생을 요구하는 현실을 성토하는 이들의 주장이 공감을 얻으며 전 세계 700여 도시의 민중 봉기로 확산되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이 참에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역할을 다시한번 생각해본다.
앞 선 세대일수록 가진 자의 책무의식이 더 선명하고 실천의지도 더 강하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역사의 자취를 더듬다 보면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정황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 자원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건 영국 최고의 명문학교인 이튼스쿨 학생들이었다.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개인의 목숨은 초개처럼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불문율이었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로마 시대 귀족들도 전쟁이 일어나면 가문을 이을 한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참전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그것이 귀족의 명예를 지키는 길이고 또 반드시 지켜야 할 책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도 만석지기 부자이면서 300년 동안 대를 이어 존경받던 명품 가문이 있다. ‘경주 최 부자집’ 문중인데 흉년에는 가뭄에 농토를 인위적으로 농토를 늘리지 말라는 가르침 등 남다른 가치관으로 후대를 훈육했다. 탐욕을 경계하고 더불어 사는 가치관을 심어준 선대의 특별한 가르침이 최부자집 명성을 이어갈 수 있게 한 비결이 아닐까 싶다.
결국 노블리스 오블리주 실천이 사회를 안정시키고 스스로에게도 엘리트로서 사회적 책무를 다한 존재가치를 인식시키는 순기능으로 거듭난다는 결론이다.
태국사태나 뉴욕의 풍경이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불과 얼마 전 우리에게도 1%의 몰염치를 질타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여의도 광장에 모인 그들의 미약한 시작이 어떤 결론으로 도출될지 지금으로선 누구도 예단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 도처에 깔려있는 1%의 횡포 사례는 반성과 자숙만으로 해결점을 찾기엔 이미 금도를 넘은 느낌이다. 최근 언론 보도를 통해 드러난 재벌회사들의 파렴치한 행각들만 해도 그렇다.
중소기업 생존을 위협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번에는 근로자 노임까지 가로챘다는 혐의다.
재벌기업이 지자체 청소용역 대행 사업에 끼어든 것도 민망한 일인데 노임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다니 할 말을 잃게 한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그렇지 어려운 노동자들의 임금까지 착취했어야 했을까 싶어 부끄러움에 얼굴이 뜨겁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이 불러온 이 서글픈 현장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척결해야 할 과제다.
이런 식으로 어렵고 힘든 이들을 궁지로 몰아가면 그들의 분노가 어디로 향하게 될 지는 너무나 뻔한 일이다. 그들의 분노가 폭풍이 되어버리면 그 때는 수백배 수천배의 대가를 지불하고도 막아내지 못하게 되는 건 불문가지다.
이는 자본주의와의 대결구도에서 패배한 공산주의 몰락을 통해서도 익히 경험한 바다.
각각의 장단점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가 패배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자유에 대한 개념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결과였다는 생각이다.
기득권 계층의 탐욕을 제어할 기능을 갖지 못한다면 대한민국 사회에서의 자본주의 역시 사상누각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이 메시지의 지침대로 스스로는 물론 국가전체를 정갈하게 운용할 수 있는 수 있는 통합의 리더십이 간절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2012년이 다가오고 있어 더욱 더 그런 생각을 하게되는 것 같다.
(2011. 11.2)
....홍문종 생각
2011년 11월 1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낙엽이 부르는 길
낙엽이 부르는 길
무심히 시작된 가을이 옛 노래 속에서 깊어지고 있다.
바바리 깃 올린 고독한 뒷모습이 아니어도 거리를 구르는 한 점 낙엽에조차 가슴이 뭉클해지는 사내의 감성이 그저 부담스럽기만 한 계절이다.
오늘도 소요학파의 맹렬 추종자답게 고독을 씹으며 낙엽이 부르는 가을 길을 걸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고 옷깃을 여밀 정도로 바람이 싸늘해지면 떠나버린 사랑이 그리워진다는 태고적 사연을 따라 온종일 낙엽을 몰고 다녔다. 나이도 직위도, 주어진 처지 같은 건 말끔히 잊은 채 캠퍼스를, 철둑길을, 산 중을 걸으며 낙엽 속에서 개똥철학을 건져 올렸다.
무더기를 이룬 낙엽의 면면을 들여다보기도 했는데 그 때 처음 알았다.
그 들 중 어떤 것도 서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색깔도 모양도 세상에 나온 시기도 소멸의 시기도 어쩜 이리도 다를 까 싶게 제각각이었다.
닮은 게 있다면 마지막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으려 용쓰는 그 처연한 모습을 꼽을 수 있을까?.
문득 푸르고 싱싱했던 지난 기억은 까맣게 잊고 ‘추락’으로 삶을 마감해야 하는 제 운명에 순응하고 있는 낙엽의 처신이 눈물겹다는 생각이다. 냉정히 생각하면 그런 식의 마감은 나뭇잎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을 터다. 하루 이틀 시간차는 있을 지라도 절대로 예외가 존재하지 않는 쌍둥이처럼 닮아있는 삶의 대기표로 대변할 수 있는 것 말이다.
그러고 보니 가을이면 유난히 심해지는 내 센티멘탈리즘은 낙엽으로부터의 청구서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가을이면 시도 때도 없이 마음 속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 있던 미련이 아스라한 슬픔으로 피어나는 가 싶기도 하다.
너의 역할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나.
단풍잎 하나 집어 들고 속삭였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이랬다.
아니지요. 더 많이 발효된 다음 산산히 분해된 분진으로 새로운 생명들이 겨울을 견디고 봄이 되면 소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책임이 남아있는 거지요.
파르르 생명줄을 떠는 단풍의 모습이 더 없는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그 순간 눈앞의 만산홍엽이 그토록 우리 마음을 끄는 건 외형의 멋스러움 때문이 아니라 그들 안에 내재된 숭고한 사명의식 덕분이라는 깨달음이 뇌리를 스쳐간다.
낙엽이 지고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사라질 뿐이고 새 생명의 창조적 근원으로 환치되는 중이다.
적어도 제 한 몸을 온전히 제대로 희사하는 과정을 완성했다면 말이다.
그것은 수없는 세월을 이어온 재탄생의 위대한 작업이기도 하다.
인간도 낙엽처럼 최후가 예약돼 있는 존재다.
그 어떤 명분으로도 거스를 수 없는 절대 절명의 한계다.
문득 자칫하면 한 잎 낙엽보다 못한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엄습한다.
다음 세대를 위한 창조적 역할을 외면한다면 아무리 만물의 영장을 자처한 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한낱 우주의 쓰레기 더미를 높이는 데 일조했다는 오명으로 남게 될 수 있음을 경계할 일이다.
우리가 공의의 삶을 지향하는 이유는 죽지만 죽지 않기 위해서다.
영원한 생명의 불꽃으로 타오르기 위한 삶의 에너지를 모으고 있는 것이다.
생각 없이 살다 사라질 인간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또 다른 삶의 영역이다.
......
인간은 죽는다.
인간은 죽지 않는다.
희망으로 시작하는 11월의 첫 날을 이렇게 마감한다.
(2011. 11. 1)
....홍문종 생각
무심히 시작된 가을이 옛 노래 속에서 깊어지고 있다.
바바리 깃 올린 고독한 뒷모습이 아니어도 거리를 구르는 한 점 낙엽에조차 가슴이 뭉클해지는 사내의 감성이 그저 부담스럽기만 한 계절이다.
오늘도 소요학파의 맹렬 추종자답게 고독을 씹으며 낙엽이 부르는 가을 길을 걸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고 옷깃을 여밀 정도로 바람이 싸늘해지면 떠나버린 사랑이 그리워진다는 태고적 사연을 따라 온종일 낙엽을 몰고 다녔다. 나이도 직위도, 주어진 처지 같은 건 말끔히 잊은 채 캠퍼스를, 철둑길을, 산 중을 걸으며 낙엽 속에서 개똥철학을 건져 올렸다.
무더기를 이룬 낙엽의 면면을 들여다보기도 했는데 그 때 처음 알았다.
그 들 중 어떤 것도 서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색깔도 모양도 세상에 나온 시기도 소멸의 시기도 어쩜 이리도 다를 까 싶게 제각각이었다.
닮은 게 있다면 마지막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으려 용쓰는 그 처연한 모습을 꼽을 수 있을까?.
문득 푸르고 싱싱했던 지난 기억은 까맣게 잊고 ‘추락’으로 삶을 마감해야 하는 제 운명에 순응하고 있는 낙엽의 처신이 눈물겹다는 생각이다. 냉정히 생각하면 그런 식의 마감은 나뭇잎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을 터다. 하루 이틀 시간차는 있을 지라도 절대로 예외가 존재하지 않는 쌍둥이처럼 닮아있는 삶의 대기표로 대변할 수 있는 것 말이다.
그러고 보니 가을이면 유난히 심해지는 내 센티멘탈리즘은 낙엽으로부터의 청구서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가을이면 시도 때도 없이 마음 속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 있던 미련이 아스라한 슬픔으로 피어나는 가 싶기도 하다.
너의 역할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나.
단풍잎 하나 집어 들고 속삭였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이랬다.
아니지요. 더 많이 발효된 다음 산산히 분해된 분진으로 새로운 생명들이 겨울을 견디고 봄이 되면 소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책임이 남아있는 거지요.
파르르 생명줄을 떠는 단풍의 모습이 더 없는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그 순간 눈앞의 만산홍엽이 그토록 우리 마음을 끄는 건 외형의 멋스러움 때문이 아니라 그들 안에 내재된 숭고한 사명의식 덕분이라는 깨달음이 뇌리를 스쳐간다.
낙엽이 지고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사라질 뿐이고 새 생명의 창조적 근원으로 환치되는 중이다.
적어도 제 한 몸을 온전히 제대로 희사하는 과정을 완성했다면 말이다.
그것은 수없는 세월을 이어온 재탄생의 위대한 작업이기도 하다.
인간도 낙엽처럼 최후가 예약돼 있는 존재다.
그 어떤 명분으로도 거스를 수 없는 절대 절명의 한계다.
문득 자칫하면 한 잎 낙엽보다 못한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엄습한다.
다음 세대를 위한 창조적 역할을 외면한다면 아무리 만물의 영장을 자처한 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한낱 우주의 쓰레기 더미를 높이는 데 일조했다는 오명으로 남게 될 수 있음을 경계할 일이다.
우리가 공의의 삶을 지향하는 이유는 죽지만 죽지 않기 위해서다.
영원한 생명의 불꽃으로 타오르기 위한 삶의 에너지를 모으고 있는 것이다.
생각 없이 살다 사라질 인간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또 다른 삶의 영역이다.
......
인간은 죽는다.
인간은 죽지 않는다.
희망으로 시작하는 11월의 첫 날을 이렇게 마감한다.
(2011. 11. 1)
....홍문종 생각
2011년 10월 31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문패 바꾼다고 되나?
문패 바꾼다고 되나?
10.26 재보궐 선거 참패 이후 정부 여당의 입지가 갈수록 좁혀지는 모습이다.
백척간두의 운명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당 쇄신 처방이 홍수를 이루지만 정작 이를 지켜보는 국민의 반응이 영 시큰둥하니 문제다. 당명 개정 등의 해법은 문패만 바꾼다고 나아지겠느냐는 타박 앞에 명함도 못 내미는 형국이다.
대통령이라고 형편이 나은 것은 아니다. 여당과 한 묶음이 되어 뭇매를 맞는 가 싶더니 급기야 ‘연산군 보다 더 못한 단군 이래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소리를 듣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쏟아지는 여론의 몰매가 우선 당장은 아프겠지만 한나라당 미래를 위해서는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다.
어떤 면에서는 더 혹독한 비난과 채찍질이 필요하다.
귀담아 듣고 개선할 수 있다면 오히려 더 큰 폭의 도약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당이 기꺼운 마음으로 이 어려운 국면을 감내하겠다는 의지를 다져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늘 느끼는 바지만 한나라당 진영엔 전략이 없다. 소통도 없다.
지나치게 비대하고 지나치게 둔감해서 늘 반응이 늦다.
이 같은 폐단은 이번 선거과정을 통해서도 고스란히 재현됐다.
한나라당이 네거티브나 색깔론 같은 20세기 선거 행태에 매몰돼 있는 동안 상대 진영은 광속의 빠르기로 선거운동을 펼쳤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분위기다. 낡아빠진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제트엔진으로 진화하는 SNS의 위력을 간과했다. 더 이상 메이저 언론의 선동에 구동되지 않는 선거판 진실을 간파하지 못하고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대변되는 신개념의 소통기구를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방관한 그 죄(?)가 참으로 크다고 하겠다.
내년 총선에서 청년 비례대표를 뽑거나 법조인 출신을 배제하겠다는 등의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의 구상이 반향을 얻지 못하는 분위기다. 호응을 이끌어 내지 못하기로는 당내 다른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그럴 듯한 쇄신론이 우후죽순 봇물을 이루지만 여전히 공허한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나라당이다.
결국은 진정성의 문제다.
스스로가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이면서도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듯 해맑은(?) 표정으로 내놓은 해법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리 만무다.
당이 회생하려면 전략이 뒷받침 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는 절박함은 물론 환골탈태 수준의 변화가 불가피하다.
보수의 발전을 위한다면 진보진영 화법의 벤치마킹을 고려할 것을 권하고 싶다.
선명하고 강렬한 선거구호의 시각적 효과도 선거판 당락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요소다. 예를 들어 ‘연산군보다 못한 대통령’이라는 공격에는 ‘불임정당’이나 ‘신중우정치’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자극적인 표현으로 대응하는 식이다. 분명하게 뜻이 닿고 젊은이들이 신명나게 외칠 수 있는 부분까지 고려한 구호의 생산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수진영 화법은 분명 비효율적이다. 무엇보다 지나치게 근엄하고 가라앉아 있어 마치 한편의 잘 정리된 논문 같은 느낌을 주는 화법으로는 찰나적이고 감각에 길들여진 젊은 피들을 설득하기 어렵다.
혹자는 정해진 패턴을 벗어나면 보수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고 걱정하지만 보수의 가치가 체면이 깎이는 상황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것에 발목 잡혀 망설이다 보니 ‘점진적 무상급식’이니 ‘대안없는 반값 등록금’ 등이니 하는 애매모호한 구호로 고립을 자처하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어떻게 국민을 설득할 것이며 더 나아가 투표에 임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겠는가.
서울시 입성에 성공한 박원순 시장은 자신의 공약인 무상급식 사업을 결재하는 것으로 시장 업무를 시작했다. 당분간은 누구도 보무당당한 박시장 행보에 제동을 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승자인 박시장의 당연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패자인 오세훈 전 시장은 자신이 세웠던 시책들이 전면 백지로 되돌려질 위기에 처해 있다. 승자에 관대하고 패자에 박할 수 밖에 없는 역사의 냉엄한 현실이다.
구한 말 흥선 대원군을 주목한다.
수상한 세월을 이겨내고 자신의 원하는 바를 손에 넣고 천하를 휘둘렀던 그의 기막힌 처세술을 생각하게 된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이를 실현할 권력까지 쥐지 못하면 상황이 아주 많이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게 역사의 숙명이다. 우리의 민주주의 역사도 책임지는 정치보다 마음을 사로잡는 정치 선택을 통해 승자를 가려왔다. 구호를 만들어낼 줄 아는 정치인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 또 역사를 만들어 낸다.
물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행운을 얻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사상가로, 운이 나쁘면 몽상가로서 말이다. 이승만과 김구, 또 어떤 의미의 윤보선과 박정희 등 전직 대통령들의 삶을 비교해보면 비슷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시각으로는 보수를 위한 나의 조언에 굴욕감이 느껴질 수도 있다.
마음 한켠에 내 생각들이 틀렸으면 좋겠다는 망설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0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하는 정도로라도 받아들여져 이 땅의 보수를 진일보 시키는데 일조 할 수 있게 되길 바라는 간절함에 이 글을 블로그에 담는다.
(2011. 10.31)
...홍문종 생각
10.26 재보궐 선거 참패 이후 정부 여당의 입지가 갈수록 좁혀지는 모습이다.
백척간두의 운명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당 쇄신 처방이 홍수를 이루지만 정작 이를 지켜보는 국민의 반응이 영 시큰둥하니 문제다. 당명 개정 등의 해법은 문패만 바꾼다고 나아지겠느냐는 타박 앞에 명함도 못 내미는 형국이다.
대통령이라고 형편이 나은 것은 아니다. 여당과 한 묶음이 되어 뭇매를 맞는 가 싶더니 급기야 ‘연산군 보다 더 못한 단군 이래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소리를 듣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쏟아지는 여론의 몰매가 우선 당장은 아프겠지만 한나라당 미래를 위해서는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다.
어떤 면에서는 더 혹독한 비난과 채찍질이 필요하다.
귀담아 듣고 개선할 수 있다면 오히려 더 큰 폭의 도약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당이 기꺼운 마음으로 이 어려운 국면을 감내하겠다는 의지를 다져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늘 느끼는 바지만 한나라당 진영엔 전략이 없다. 소통도 없다.
지나치게 비대하고 지나치게 둔감해서 늘 반응이 늦다.
이 같은 폐단은 이번 선거과정을 통해서도 고스란히 재현됐다.
한나라당이 네거티브나 색깔론 같은 20세기 선거 행태에 매몰돼 있는 동안 상대 진영은 광속의 빠르기로 선거운동을 펼쳤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분위기다. 낡아빠진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제트엔진으로 진화하는 SNS의 위력을 간과했다. 더 이상 메이저 언론의 선동에 구동되지 않는 선거판 진실을 간파하지 못하고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대변되는 신개념의 소통기구를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방관한 그 죄(?)가 참으로 크다고 하겠다.
내년 총선에서 청년 비례대표를 뽑거나 법조인 출신을 배제하겠다는 등의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의 구상이 반향을 얻지 못하는 분위기다. 호응을 이끌어 내지 못하기로는 당내 다른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그럴 듯한 쇄신론이 우후죽순 봇물을 이루지만 여전히 공허한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나라당이다.
결국은 진정성의 문제다.
스스로가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이면서도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듯 해맑은(?) 표정으로 내놓은 해법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리 만무다.
당이 회생하려면 전략이 뒷받침 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는 절박함은 물론 환골탈태 수준의 변화가 불가피하다.
보수의 발전을 위한다면 진보진영 화법의 벤치마킹을 고려할 것을 권하고 싶다.
선명하고 강렬한 선거구호의 시각적 효과도 선거판 당락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요소다. 예를 들어 ‘연산군보다 못한 대통령’이라는 공격에는 ‘불임정당’이나 ‘신중우정치’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자극적인 표현으로 대응하는 식이다. 분명하게 뜻이 닿고 젊은이들이 신명나게 외칠 수 있는 부분까지 고려한 구호의 생산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수진영 화법은 분명 비효율적이다. 무엇보다 지나치게 근엄하고 가라앉아 있어 마치 한편의 잘 정리된 논문 같은 느낌을 주는 화법으로는 찰나적이고 감각에 길들여진 젊은 피들을 설득하기 어렵다.
혹자는 정해진 패턴을 벗어나면 보수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고 걱정하지만 보수의 가치가 체면이 깎이는 상황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것에 발목 잡혀 망설이다 보니 ‘점진적 무상급식’이니 ‘대안없는 반값 등록금’ 등이니 하는 애매모호한 구호로 고립을 자처하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어떻게 국민을 설득할 것이며 더 나아가 투표에 임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겠는가.
서울시 입성에 성공한 박원순 시장은 자신의 공약인 무상급식 사업을 결재하는 것으로 시장 업무를 시작했다. 당분간은 누구도 보무당당한 박시장 행보에 제동을 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승자인 박시장의 당연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패자인 오세훈 전 시장은 자신이 세웠던 시책들이 전면 백지로 되돌려질 위기에 처해 있다. 승자에 관대하고 패자에 박할 수 밖에 없는 역사의 냉엄한 현실이다.
구한 말 흥선 대원군을 주목한다.
수상한 세월을 이겨내고 자신의 원하는 바를 손에 넣고 천하를 휘둘렀던 그의 기막힌 처세술을 생각하게 된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이를 실현할 권력까지 쥐지 못하면 상황이 아주 많이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게 역사의 숙명이다. 우리의 민주주의 역사도 책임지는 정치보다 마음을 사로잡는 정치 선택을 통해 승자를 가려왔다. 구호를 만들어낼 줄 아는 정치인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 또 역사를 만들어 낸다.
물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행운을 얻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사상가로, 운이 나쁘면 몽상가로서 말이다. 이승만과 김구, 또 어떤 의미의 윤보선과 박정희 등 전직 대통령들의 삶을 비교해보면 비슷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시각으로는 보수를 위한 나의 조언에 굴욕감이 느껴질 수도 있다.
마음 한켠에 내 생각들이 틀렸으면 좋겠다는 망설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0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하는 정도로라도 받아들여져 이 땅의 보수를 진일보 시키는데 일조 할 수 있게 되길 바라는 간절함에 이 글을 블로그에 담는다.
(2011. 10.31)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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