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12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유리동물원

유리동물원



고백하건데 안에 있을 때는 정치판이 이렇게 비쳐지는 곳인지 몰랐다. 이렇게 까지 심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몇 년간 정치판을 떠나 보니 알겠다. 국민들이 어떤 심정으로 정치판을 지켜보고 있는지.

밖에 있으니 환히 들여다보이는 정치판 행태가 참으로 가관이다. 유리동물원 속 원숭이를 구경하는 기분이 이럴까...

우스꽝스러운 원맨쇼가 따로 없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부끄러움에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을 지경이다.

그 어떤 미사여구로 자신을 치장한들 국민들 눈에는 벌거벗은 임금의 자아도취일 뿐이다. 그 후진성이 국민들에게 얼마나 한심하게 비쳐지고 있는지 안다면 차마 못할 짓들을 멀쩡한 표정으로 해내고 있는 무모함이라니.



전당대회를 앞두고 제어되지 않는 진흙탕 싸움으로 치닫고 있는 백가쟁명의 한나라당에서도 비슷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오죽하면 직전 대표가 이대로 가다간 (한나라당 운명이) 타이타닉 같은 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고 걱정하겠는가.

지도부가 되겠다고 나선 후보들 간의 이전투구만으로도 기운 빠진 당의 명운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정당 존립을 위한 외연 확장 기회로 삼아야하는 전당대회의 원래 목적이 무색해질 정도로 치명적인 공격과 독설이 난무하고 있다. 사욕 때문에 당의 존립기반이 흔들리는 형국이다.

지켜보고 있는 국민이나 당원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자기 것 쟁취에만 혈안이 돼 있는 모습들이다. 스스로의 행동이 당에 어떤 식으로 위해를 가하고 있는 지조차 알지 못하는 이기심이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다.



명색이 당의 대표를 뽑는 선거인데 전국적인 이슈 하나 없다. 국민적 지지는커녕 관심조차 이끌어 내지 못하고 있다.

올망졸망 난립된 후보들이 명분도 철학도 없이 그저 치고 박기로 그들만의 치졸한 리그에 열중하고 있다. 자신은 물론 당 전체의 명운을 갉아먹는지도 모르고 서로를 향한 삿대질에만 열을 올리는 모습이라니.

그렇다고 처절한 자기반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열 명이 넘는 후보들이 자신만큼은 당의 과오와 무관하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지방선거 참패결과로 당에 철퇴를 가한 민심을 생각한다면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우리 당이 이런 잘못을 했다. 너무나 잘못됐다. 앞으로는 잘 할 테니 용서해 달라는 읍소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디를 봐도 정작 있어야 할 고해성사는 없고 오직 나만 잘났고 다른 후보는 못났다는 주장 투성이다.

그렇게 해서 지도부가 선출된 들 어떻게 그 권위를 보장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국민과 당원에게 철저하게 외면받는 지도부는 안타깝지만 단명할 게 뻔하다.

암담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이래서는 한나라당의 미래는 없다.

한 두사람의 개인적인 영향력으로 조종되는 정당구조로는 더 이상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없게 돼 있다.

아무리 용을 써도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정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국민의 마음을 담지 못하고 정권재창출을 꿈꾸는 건 언감생심이다.

핵심은 지도부의 의중이 아니라 민심이라는 엄밀한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번 전대를 통해 기존 틀을 깨고 거듭나야 그나마 살 길이 있다. 입으로만 외치는 쇄신이 아니라 뼈 속 깊이 반성을 거친 쇄신의지로 당 재건에 나서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절박함이어야 한다.

계파와 보스에 매달리기보다 세상과 국민을 바라보는 새 모습으로 환골탈태하느냐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유리동물원을 과감히 깨뜨려야 한다.

그래야 길이 보일 것이다.



한명이라도 내 주장이 틀렸다고 반박해 줬으면 좋겠다.

그만큼 희망의 분량이 많은 증거가 될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
(2010. 7. 12)
...홍문종 생각

2010년 7월 10일 토요일

홍문종생각-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품 인생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품 인생을



방학 때문에 생긴 여유를 세상살이에 쏟고 있는 요즈음이다.

그동안 바빠서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이나 특별히 나와 다르게 살아가는 이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의 삶이 거기서 거기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고 있다.



며칠 전 내 정치행로에 危害를 가하고 상처를 줬던 ‘사람’이 찾아왔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배신자라 칭하며 자신의 지난 죄상(?)을 고해성사했다. 본인은 숨겨진 그림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물론 많은 이들이 익히 알고 있던 일련의 음모들이 당사자의 입을 통해 재생됐다.

양심의 가책 때문인지 삶의 줄기를 쥐고자 하는 방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의 바닥을 송두리째 드러내 내게 내밀었다. 나를 배신했던 대가를 제대로 얻지 못했던 울분도 함께 보여줬다.

담담한 마음으로 그를 볼 수 있었다. 평정심의 발로라기보다 인간의 나약한 한계를 확인하게 되면서 전의를 상실하게 되는 그런 상황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주변인의 유고를 접하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한 끼 먹는 것조차 아까워하며 아등바등한 끝에 무일푼에서 엄청난 자산을 이뤘지만 암으로 세상을 떠난 A씨, 재력가의 아들로 태어나 유일한 취미가 돈쓰기이고 제일 열심히 한 일이 술 마시기로 꼽을 정도로 세상을 허탕하게 살다가 결국 술로 목숨을 잃은 B씨. 돈도 없고 배경도 없이 무색무취로 인생을 가늘게 이어가다가 흔적도 없이 죽어간 C씨,

이들이 남긴 삶의 궤적은 현격히 달랐지만 죽음이라는 종착역은 같았다. 아무리 특별해도 죽음 앞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자손에게 물려준 유산이 화근이 되어 상갓집이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경우도 인생을 돌아보게 만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만은 예외라는 생각으로 독특하고 특별한 삶의 주인공을 자처하며 살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부모님이나 이웃의 삶을 판박이로 반복하고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버둥거려도 인생이라는 건 어쩌면 자기만의 노래를 부르다 소멸되는 단순한 과정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인생이 결국 죽음을 향한 노정이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죽게’ 돼 있다면 어떻게 살든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고개를 든다. 선악의 가치기준이나 또 이에 따른 판단과 실천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문득 인생이 허무하다는 말에 공감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인생을 막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평생에 걸쳐 나를 관통하는 내 인생의 화두이기도 하다.

아쉽고 허무하다는 생각에만 방점을 찍는다면 그야말로 의미없는 삶이 되고 만다. 경계해야 할 현실이다. 허무하고 크게 다르지 않은 인생이라고 해도 결국은 나만의 인생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던 어차피 자기가 믿는 대로 살게 돼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던지 확실하고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발견한 아메리카 대륙을 죽을 까지 인도라고 믿었던 콜롬부스가 어떤 의미에서는 더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 중심의 이기적 사고로 봐서는 진리의 왜곡은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꿈을 향해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노력이 더 없이 소중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현실에서의 삶과 내세를 위한 삶, 둘 다를 충족시키는 가치관으로 인생을 꾸려나가겠다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된 배경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믿자.

나의 꿈을 믿자.

수많은 인생들이 앞서 불렀던 행복과 환희의 노래를 증거로 삼자.

지난 밤 번민의 터널을 뚫고 스스로에게 내민 ‘처방전’이 새로운 에너지로 다가온다.

여러 조건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극복하고 홍문종 만의 명품 인생을 만들기 위한 가열찬 정진을 지금부터 시작해야겠다.
(2010 .7. 10)

....홍문종 생각

2010년 7월 8일 목요일

홍문종생각-블랙리스트

블랙리스트



개그우먼 김미화씨가 트위터를 통해 블랙리스트 의혹을 제기하자 KBS가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나서면서 논란을 키우고 있다. 과잉 대응이 아닐까 싶다. 긁어 부스럼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특별한 복안이 있다면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수순처럼 고발을 감행했다면 KBS의 패착이 분명하다. 우선 당장 진중권, 유창선 두 사람이 비슷한 경험을 내놓으며 가세하자 KBS에 대한 비난여론이 빠른 속도로 번지는 정황만 보아도 그렇다.

문제는 국민 여론이 권력 주변부에 깊은 불신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외압 시비는 비단 KBS 뿐 아니라 여타 사례를 통해서도 국민반감을 불러온 전력이 있다.

펄쩍 뛰며 결백을 주장하는 KBS보다 김미화의 하소연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역력한 작금의 상황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돼야 할 것이다.



국민에게 있어 입맛에 맞지 않은 인사들에 대한 권력 주변부의 압력행사 혐의는 거의 확신범 수준이다. 김미화의 ‘단발마’에 그토록 많은 사람을 반응하는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확신들이 이번 사건을 통해 김미화를 또 한 명의 김제동으로 복제시키고 있다. 평범한 개인을 힘 있는 반정부 인사로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앞서 비슷한 경로로 형성된 퇴출 인사들의 유명세가 민심에 어떤 식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가를 보라. 정치권의 러브콜 대상이 될 만큼 거물로 성장하지 않았는가.

한나라당이 총공세에 시달리며 수세에 몰리고 있는 걸 보면 트로이 목마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다.



국민여론이 KBS에 핵심세력이 주도하는 (유형이든 무형이든)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현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인보다 신뢰받지 못하는 공영방송의 암담한 현실을 목도하는 심정이 착잡하다.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이런 식의 구설은 집권당에 불리할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자칫 허명이라도 이름을 날릴 목적이나 이를 부축이는 세력에 의해 제2, 제3의 ‘블랙리스트’ 파동이 획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정황을 걱정해야 한다.

공영방송은 물론 정치적 중립이 담보돼야 할 조직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번 기회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영방송이 외부적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중립성과 공공성을 유지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체질 개선에 나서는 진정성을 보인다면 돌아선 국민의 마음을 얻게 될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 힘 있는 인사들의 각성과 역할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권력의 향방과 상관없이 공공성 유지가 가능한 항구적인 조직으로 거듭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확보해 보자.



트위터 세대를 따라잡을 수 있기 위한 기성세대의 고군분투가 필요한 상황이다.

정부의 트위터 세대에 대한 대응도 지금과는 많이 달라져야 한다. 인력도 별로 없는 검경이 이들을 따라잡겠다며 무조건 감시대상으로 몰고 가는 건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세대와의 공감대 확보는 물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새로운 아젠다나 컨텐츠 개발 등의 합리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젊은이들에게 기성세대의 장점을 본받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현란함에 빠져들지 않는 지혜도 요구된다.



때 마침 은평 재선거 국면에서 신경민 MBC 앵커가 이재오 전 권익위원장의 대항마로 거론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블랙리스트 파동이 정부 여당의 발목을 잡는 악재가 되지 않도록 지혜로운 처신이 뒤따라야겠다. 지난 지방선거의 악몽을 재현하는 촉발제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2010 . 7. 8)

....홍문종 생각

2010년 7월 6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성폭행, 우리 모두의 문제다

성폭행, 우리 모두의 문제다



왜 이렇게까지 됐는지 모르겠다.

나라 전체가 아동을 상대로 한 성범죄 때문에 발칵 뒤집혀 있는 이 와중에 보호자와 함께 있던 아동을 상대로 성폭행을 시도한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는 일이 벌어졌다.

대낮에 할머니와 함께 놀이터에서 놀던 여섯 살 여아를 성폭행하려다 검거됐는가 하면 새벽에 집에서 자고 있던 3살, 7살 여아들을 성폭행하려다 함께 있던 할머니가 저항하자 할머니에게 위해를 가하면서까지 재차 범행을 시도하던 범인이 도망가 버린, 믿기 힘든 일들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기가 막힌다.

이제는 홀로 있는 아동 뿐 아니라 보호자와 함께 있어도 그 안위를 장담할 수 없게 됐다.

갈수록 도를 넘고 있는 범인들의 인면수심을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할 지 정말 걱정이다.




늘어나는 성범죄 배경에 혹시 환경 파괴가 관련돼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환경 파괴가 비정상적인 주변 여건을 형성하고 그것이 인간성 파멸 초래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단초로 작용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마치 정신질환이 유발되는 과정처럼 말이다.

인간성 파괴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마저도 저버리는 ‘무개념’의 범죄를 양산시킬 수 있다는 가정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솔직히 아동 성폭행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번 처음 일은 아니다. 그 때마다 화닥닥 끓어오르는 여론을 타고 금방이라도 범죄가 '박멸‘될 듯한 기세였지만 결과는 언제나 도루묵으로 끝난 전력이 있다.

인간의 추악함이 어디까지 하한선을 두고 있는 건지 그 끝을 알 수 없기에 대안 제시가 무기력해지는 분위기다. 성폭행 근절을 위해 ‘화학적 거세’ 등의 방안이 나오고 있지만 정작 근본적 치유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 답답하기만 하다. 오히려 사회적 관성이 되어 ‘불감증’을 키우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기까지 하다.



나로서도 무슨 뾰족한 대책이 있는 건 아니지만 깨우치도록 알려주는 게 그나마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은 누구나 타의에 의해 강요받지 않을 권리를 가진 인격체임을 가르쳐줘야 한다. 특히 물리적 힘으로 상대의 권리영역을 침범하는 행위가 얼마나 큰 죄악인지를 어렸을 때부터 심어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내가 타인의 침범이 싫은 것처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중고등학교에서 윤리나 도덕 부분을 강화하는 노력이 실천돼야겠다. 솔직히 그동안 학력 만능주의에 치여 자라는 세대에게 정작 필요한 인성 교육이 소홀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좀 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교육현장의 인성강화 교육에 주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방법의 일환으로 신앙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싶다.

모든 종교들이 계파나 종파를 떠나 인간의 기본소양을 쌓을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다면 사회적으로 인간성 회복에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즈음 교회나 사찰들이 너무 눈에 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지역사회의 공동체 교육을 통한 방법은 어떨까 싶다.

마을 단위로 건전하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어른들이 주체가 되어 특별히 우려되는 사람이나 집단을 대상으로 행하는 일종의 시민교육 형태가 그것이다.



아동 성폭행 피해자의 경우, 평생에 걸쳐 영향을 미치는 트라우마를 갖게 되고 심하면 인격 장애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학계의 보고가 있다.

한 순간의 비뚤어진 욕망이 한 사람의 인생을 철저히 망가뜨릴 수 있는 성폭행에 대한 문제의식을 달리가져야 할 시점이다.

대담해지고 만연돼 있는 범죄행각만 봐도 더 이상 ‘강 건너 불구경’으로 처리할 수 없는 다급한 지경이 됐다. 우선 당장 어느 누구도 피해범주에서 자유롭다고 장담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도 그렇다.

우리 모두의 책임과 의무라는 생각을 갖고 성폭행 근절에 한마음으로 나서야하는 이유다.
(2010.7.7)
...홍문종 생각

2010년 7월 5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마라도나

마라도나



축구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라도나를 기억할 것이다.

왼발 하나로 세계 축구를 좌지우지 하는 실력으로 신의 경지라는 호평에도 불구하고 무절제한 사생활과 돌출적 언행으로 인한 끊임없는 불화 때문에 그라운드의 악동으로 빈축을 사던 그를 말이다. 특히 아르헨티나를 월드컵 정상에 끌어올리던 순간의 그를 기억하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마약 중독, 탈세, 폭행 등 온갖 추문을 일으키며 축구계에서 사라지는가 싶었던 마라도나가 남아공 월드컵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 눈길을 끌었다. 이번에는 선수가 아닌 아르헨티나를 진두지휘하는 사령탑으로서였다.



독설과 잦은 말실수는 여전했지만 아르헨티나가 우리를 4:1로 꺾을 때만 해도 감독으로서 그의 재기 가능성은 매우 높아 보였다. 그러나 4강을 다투는 독일전에서 마라도나의 화려한 귀환의 꿈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0:4라는 전적으로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제대로 완패를 당한 것이다.

이런 저런 독설로 잘난 척 할 때는 밉상이더니 축 처진 어깨로 귀국길에 오르는 마라도나의 뒷모습이 연민을 느끼게 했다.



마라도나의 퇴락으로 인간의 자신감과 교만의 경계선을 생각하게 된다.

자신감은 인간을 신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리기도 하지만 철저히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한다.

측정하기 힘든 그 경계가 언제나 문제다.

자신감에 대한 호감에도 불구하고 제 위치를 고수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긴장감을 놓을 수 없다. 조금만 넘치면 교만이 되고 또 조금만 부족해도 열등감이 생성되는 특성 때문이다.

결국 교만과 열등감은 자신감의 긍정적 영역을 호시탐탐 엿보는 일란성 쌍둥이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과유불급.

독일과 아르헨티나 전을 보면서 만고불변의 이 진리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됐다.

예선전에서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어 무적의 함대 같던 아르헨티나가 저조한 기록으로 전력이 많이 약해진 것처럼 보였던 독일에게 처참하게 패한 것은 실력차이가 아니라 그들의 정제되지 않은 자만심에 있었던 것 같다. 비록 축구에 불과하지만 독일과 아르헨티나의 극적인 반전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일상에서도 못 미치는 것도 넘치는 것도 결국은 문제가 되는, 과유불급의 진리를 깨우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사람은 신뢰가 안가고 뭔가를 함께 도모하기 싫어진다. 지나치게 자신감을 보이는 사람 역시 못지않은 우려를 주고, 결과에 있어서도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는 점에서 반겨지지 않는 게 사실이다.

골프를 치면서도 과유불급의 교훈을 절감하게 될 때가 많다.

충만한 자신감으로 의욕이 너무 넘치다 보면 '버디' 찬스가 '보기'가 되고, 자신이 없는 날은 지나친 소심함 때문에 쉬운 '파' 찬스를 '보기'로 만든 경험은 나만의 경우가 아닐 것이다.



과유불급이 문제라면 중용이 답이 되겠지만 이 역시 생각처럼 쉽게 얻어지는 ‘경지’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만이나 열등감으로 인한 결과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려는 태도 역시 패배의식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정진과 성찰로 자신의 삶을 체크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자기의 현실을 뛰어넘으려는 시도는 인간에게 있어 더 없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기게 된다.

현재나 과거의 자신을 점검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미래 지향점을 챙기는 과정이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



과유불급의 저울추로 삶의 무게를 재어가며 희망의 부피를 키우자고 마음을 다 잡아 보는 이 아침, 새로운 생명력에 힘이 솟는다.
(2010.7.6)

...홍문종 생각

홍무종생각 - 영포회

영포회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는, 이른 바 '영포회 사건'을 바라보는 심정이 편치 않다.

온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얘기다.

경북 포항 출신 고위공무원 모임인 '영포회'가 불법사찰을 주도한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청와대와 여당까지 긴장하고 있는 분위기다. 영포회 조직에 권력 실세가 관여하고 있다는 증언들이 튀어 나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터다.

며칠 전에는 불법 사찰의 피해 당사자가 자신이 당한 봉변을 고발하는 시사프로그램이 안방에 방영되기도 했다. 평생을 공직과 무관하게 살아온 한 민간인이 영문도 모르는 사이에 관의 횡포에 인권을 유린당한 사실이 여러 정황과 함께 낱낱이 공개된 것이다.



‘영포회’라는 초법적 기구가 존재하는 건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다.

이런 구시대적 발상이 아직도 통용되고 있고 그런 세상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 내가 지금 21세기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게 맞나 싶기도 하다.

권력의 횡포가 한 개인을 얼마나 무기력하게 무너뜨릴 수 있는 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자신 사찰 대상으로 시달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감시하는 보이지 않는 손길을 의식해야 하는 긴장감은 거의 공포다. 그것이 얼마나 인간을 황폐하게 만드는 비인간적인 행태인가는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감마저 말살시킨다는 점에서 당사자에게 남기는 상처가 너무 깊다고 할 수 있겠다.



시중에 퍼지고 있는 이런 저런 ‘설’들을 듣고 있자면 기가 막힌다. 거의 백주 대낮에 활개를 치고 있는 강도떼들의 괴담 수준이다.

문제는 중심을 잃은 무소불위의 권력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이다.

대통령 권력에 기댄 측근들이 스스로의 권력에 취해 버린 나머지 마음만 먹으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대박 난 로또 주인이라도 된 양 대통령 못지않은 권력을 휘두르다 탈이 난 것이다.

정권 종식의 단초가 되었던 3.15 부정선거와 부마사태가 떠오른다.

그 때도 사찰과 공포정치가 문제였다. 사찰에 이어진 강력한 공포정치가 이 두 사건에 빌미를 제공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다.

도덕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이해관계로만 똘똘 뭉친 정권의 말로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도덕과 원칙을 갖추지 못한 리더십이 얼마나 무기력했는지도 너무나 잘 아는 우리다.

왜 민간인 사찰 파장을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건지, 사안의 심각성을 깨닫게 해 주는 배경이 아닐까 싶다.



영포회의 망령에서 망국병으로 지탄받고 있는 지역감정을 활용하려는 교활한 기회주를 발견하게 된다.

지역주의를 이용해 자신들의 뱃속을 불리려는 의도는 매국의 개념으로 처리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대한민국의 국운을 좀 먹는 지역감정을 부축여 자기들만의 이익을 챙기려는 파렴치함은 온 천하에 공개해 지탄의 대상으로 만들어야 할 '불의'다.

'우리가 남이가'를 찾으며 족보를 따져 성골과 진골의 명확한 구분으로 ‘그들만의 리그’를 튼실히 하는데 혈안이 돼 있는 무리들이 아직도 활개를 치는 불행한 대한민국이다.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인권을 짓밟는 짓도 서슴지 않는 그들이 민주주의를 파괴했다.

덕분에 우리의 선진화는 한참을 뒷걸음질 한 상태가 됐다. 소인배들의 소탐대실이 그동안 뜻 있는 이들의 노력을 단숨에 무위로 돌려버린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파괴한 민주주의를, 이 땅의 정의를 어떻게 회복시켜야 할지 암담하다.



사조직으로 대한민국의 인권을 묶으려는 어리석은 시도야말로 우리의 선진국 진입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특히 이번 사건에 대해 치명적인 권력 내부의 증언들이 잇따르고 있는 걸 보면 대형게이트로 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통령의 레임덕을 가속화 시키고 보수 정권을 무력화 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대통령을 팔아 호가호위하는 무리들이 더 이상 우리사회를 농단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될 일이다.

정부 뿐 아니라 온 국민과 정치권도 함께 진상규명에 나서도록 하자.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들이 우리 사회를 좀 먹는 일이 없도록 모두가 파수꾼이 되어야겠다.
(2010. 7. 4)

......홍문종 생각

2010년 7월 2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아, 박용하

아, 박용하



슬픔이 그대의 삶으로 밀려와

마음을 흔들고

소중한 것들을 쓸어가 버릴 때면

그대 가슴에 대고 다만 말하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 렌터 윌슨 스미스 -





탤런트 박용하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 우기의 음습함을 더해주고 있다.
억장 무너지는 소리를 뒤로 한 채 또 한 젊음이 그렇게 사라져갔다.

영정 속 미소가 너무 환해서 보내야 하는 이들의 아픔을 자꾸만 키우고 있다.

무엇이 이 아름다운 청년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삶을 거두어들이게 했을까?

남들은 평생에 한번 만나기 힘든 성공을 거둔 삶을 두고 도대체 왜 죽고 싶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유서를 남기지 않았기에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이런 저런 정황을 미루어 짐작해 봐도 그저 나무라고 싶은 마음만 앞선다.

그보다 더한 상황에서도 열심히 꿋꿋하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조금만 더 참아보지.



평소 나는 젊은이들의 감각을 이해하고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그런 만큼 그들의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도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닥치는 생의 문제에 너무 쉽게 굴복하는 경향을 보이는 그들의 한계에 우려한다.

학업, 직장, 병역 그리고 대인관계 등 평범한 일상으로 끝날 수도 있는 상황이, 순간의 차이로 무게를 달리할 경우 도저히 감당이 안되는 ‘쓰나미’가 되는 게 문제다. 참을 수 없는 나약함이라고나 할까, 도무지 인내하려 들지 않는다. 젊은 그들에게 있어 치명적 약점이 아닐 수 없다.

자살도 마찬가지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 지레 겁먹고 항복하는 형국 아니겠는가.

정말로 죽고 싶을 만큼의 고통이지만 어차피 지나가게 돼 있다. 그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만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건 인간의 숙명일지 모른다.

다만 그 아픔을 얼마나 잘 다독일 수 있느냐에 따라 행복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자살공화국의 불명예가 아니더라도 자살은 최악의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용납될 수 없다. 오히려 인생의 무게를 감내하지 못한 나약함은 마땅히 질타를 받아야 한다.

안타깝긴 하지만 박용하의 죽음도 더 이상 미화되어서는 안 된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고통이나 슬픔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부재가 특별히 다른 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용하의 비보가 전해지자 그 실체를 드러낸 이른 바 ‘베르테르 효과’의 현장을 보고 있다.

박용하가 숨진 지 하루 만에 레이지본 멤버인 노진우가 한강에 투신했다 구명됐는가 하면 우울증을 앓던 40대 주부가 관련 보도를 본 뒤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시인 도종환은 말했다.

희망의 바깥은 없다고.

새로운 것은 언제나 낡은 것들 속에서 싹트는 거라고.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냐고.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으면서 따뜻한 꽃잎으로 피어나는 거라고.

나는 이 블로그를 통해 말하고 싶다.

역경을 이겨내지 못한 삶은 그 열매에 향기가 없다고.

자신의 생에 대해 좀 더 진지해지고 열정을 갖자고.

어차피 오게 돼 있는 어려움, 피하려고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자고.

무엇보다 그 어떤 난관도 우리의 삶을 좌초시킬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을 기억하자고.



내게도 죽음을 떠올릴 만큼 힘들던 좌절과 역경의 젊은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죽음에의 유혹을 딛고 그 지난한 시절을 이겨냈기에 오늘 날 내 나름대로의 성공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더 이상 극단의 선택은 없었으면 좋겠다.

고인의 명복을빈다.
(2010. 7. 3)
...홍문종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