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26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간장게장 vs 피자
간장 게장 VS 피자
모처럼 가족 외식을 결정했는데 출발부터 난관이었다.
메뉴 결정이 관건이 된 것이다.
간장게장을 드시고 싶다는 아버지 말씀에 따라 간장게장을 잘하는 단골 식당을 목적지로 정하려고 하자 아이들이 들고 일어났다. 간장 게장은 먹기 싫다며 피자를 먹자는 주장이었다.
가족 중 부모님과 나만 간장 게장을 선호할 뿐 모두들 피자 쪽을 원하는 분위기였다. 싫다는데 일방적으로 강요할 사항도 아니어서 절충에 나섰다.
그 결과 부모님은 간장게장, 아이들은 피자 쪽으로 메뉴를 이원화 했다. 부모님과 함께 간장게장 식당에 갔다가 아이들이 가 있는 피자집으로 이동해서 합류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부모님을 따로 모시려니 죄송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에게 서운하기도 했다.
그래서 고심 끝에 모두들 부모님이 식사하시는 곳으로 가되, (식당 측에 양해를 구하고) 피자를 주문해서 함께 식사를 하자는 수정안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역시 상황에 적합한 제안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다. 손님이 붐비는 게장 집에서 피자를 먹는 모양새가 그다지 좋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다 나머지 식구들이 간장게장이 아닌 다른 메뉴를 골라 같은 장소에서 식사를 하자는 새로운 안이 제시됐고 모두의 동의를 얻는 데 성공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해피앤딩이었다. 부모님과 아이들이 한 식탁에서 간장게장과 매운탕을 메뉴로 해서 외식 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식사를 하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가족들의 입맛 하나도 통일 시키지 못했다는 자괴감 보다는 부쩍 연로해지신 부모님과 이제 품을 떠나야 할 자식들이 마음에 걸렸다. 점점 기운을 잃어 가시는 부모님에 대한 안타까움과 천방지축 어디로 향할게 될지 모를 자식들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 노파심만은 아니었을 터였다.
그렇게 부모님과 자식들 가운데에 끼인 채 양 세대를 바라보니 내 인생의 지나간 시절과 다가오는 미래가 한꺼번에 보였다. 그리고 내가 처한 현실과 가장으로서 내가 맡은 역할의 중요성이 새삼 감지됐다. 더불어 家和萬事成의 가르침으로 가족 간의 소통을 큰 가치로 강조했던 선인들의 속뜻이 헤아려졌다.
그러면서도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어른 말씀이라면 무조건 복종을 미덕으로 알았던 우리 시대의 가치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엄청난 변화였다.
부모님과의 관계가 그랬듯 자식들과 나 역시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서로 다른 생각으로 존재하고 있는 현실이 직시됐다. 비단 부모 자식 관계에서 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개성에 따라 달리하는 생각들을 쉽게 드러내고 또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문화가 형성되고 있었다. 저마다의 가치관에 따른 선택권이 지극히 당연하게 존중되고 있었다.
외식 일정 하나만 해도 가족 전체를 배려하고 모두의 행복을 고려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모두를 만족시키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최선의 답이라고 생각했던 선택이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자식들은 자식들대로 결국은 절반 밖에 충족시키지 못한 미완의 결말이었다. 메뉴 하나 선택하는 과정도 이렇게 어렵고 복잡한데 나머지 사안들은 얼마나 어려운 절차를 감내해야 할까 싶기도 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가족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데 동의한다.
성공적인 가장이 되려면 가족 구성원의 마음을 읽으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에도 공감한다. 가족 단위의 소통 단절은 대번에 불신이 판을 치는 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게 리더의 역할에 달려있다는 생각이다.
개인의 영향력이 극대화 되고 있는 시대적 상황에서 정치 지도자가 됐건 CEO가 됐건 교육자가 됐건 같은 맥락의 역할이 화두로 대두되고 있다. 결국 21세기 리더십의 주요 명제는 서로의 다름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무엇보다 리더의 자기희생적 실천의 선행 여부가 중요하다고 본다.
대통령이나 CEO가 자기 입지만 염두에 둔다면 그 결과는 뻔할 것이다.
누구도 그를 따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따른다고 해도 자발적 동기가 결여된 복종은 면종복배에 그칠 공산이 크다. 참여의식은 물론 감동도 없이 강요당하는 구성원들이 과연 무슨 일을 해낼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그 명제는 더 더욱 확실해진다고 할 것이다.
갈수록 가족 해체 위기에 대한 걱정이 넘친다.
대한민국의 미래와 직결된 문제이기에 가벼이 다룰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연말연시의 시간들이 가족 구성원 간의 반목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의 장으로 활용되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그동안 서로에게 무엇이 부족했던 가도 반성하고 또 앞으로 무엇을 더 노력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준비하고 대비한다면 못할 바도 없다.
모든 걸 ‘나’ 위주로만 생각하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모두’가 함께 만족할 수 있는 공통 명제에 대해 고민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자. 그렇게만 된다면 절반의 성공은 이미 거둔 셈이 된다.
그런 식으로 가족간 균열도 치유하고 한 마음으로 소통할 수 있는 근간을 다지는 시간을 만들어 보자 .
(2010. 12. 26)
...홍문종 생각
2010년 7월 30일 금요일
홍문종생각 - 용서와 화해
용서와 화해
정치하는 사람 치고(호불호를 떠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본다. 특히나 큰 정치를 꿈꾼다면 반드시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할 정치인 중 최우선 순위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만큼 우리의 현대 정치사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서거 1주기를 맞아 세상에 나온 그의 ‘회고록’에 쏠리는 세간의 관심이 예사롭지 않다.
‘서자’ 신분이었던 출생의 비밀부터 YS와의 단일화 실패, 연예인 김미화에 대한 코멘트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세세하게 삶의 흔적을 담은 그의 회고록에서 특별히 내 눈길을 끄는 대목은 박근혜 전대표를 언급한 내용이었다.
실제로 김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 2004년 8월 정적(政敵)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자신을 찾아와 “아버지 시절에 여러 가지로 피해를 보고 고생하신 데 대해 딸로서 사과 말씀드립니다”라고 말한 일을 소개하면서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했다. 박정희가 환생해 내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아 기뻤다. 사과는 독재자의 딸이 했지만 정작 내가 구원을 받는 것 같았다”는 소회를 남겼다.
아버지를 대신한 박전대표의 사과에 구원을 받은 것만큼 기뻤다는 노정객의 솔직한 고백이 가슴에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용서와 화해가 그려내는 한편의 감동적인 대서사시를 보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인간을 동물과 차별화하는 정서 중에서 용서와 화해만큼 인간의 위대성을 부각시키는 기능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일상을 둘러보면 말처럼 수월하게 용서와 화해가 이뤄지는 건 아니다.
선뜻 사과하기도 그렇지만 용서 역시 쉽지 않은 현실을 감안하면 그렇다.
내게도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도저히 용서가 안되는 몇 몇의 인연이 있다. 지금으로서는 상대가 어떤 식의 사과를 한다 해도 쉽사리 포용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깊은 앙금이다.
그런데 박근혜 전대표의 사과와 관련한 김 전대통령의 술회는 (역사적 평가는 차치하고) 우리가 놓지 못하는 반목의 앙금들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용서’의 화두는 중복을 맞아 모인 가족모임에까지 따라붙었다. 작고한 지 5주기 째가 되는 동생 때문이었다.
동생은 지병으로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일기를 기록했는데 형인 내게 미처 말하지 못했던 심중의 이야기도 많이 담아 놓아 읽을 때마다 가슴을 짠하게 만들었다.
그 중 중학교 때 없어진 돈을 절대로 가져가지 않았다고 강조해 놓은 부분은 쉽사리 덜어낼 수 없을 마음의 짐이 되고 말았다. 동생에게 해 주지 못한 미안함 중에서 가장 무거운 무게로 말이다. 동생이 죽기 전에 말해주었더라면, 아니 내가 미리 사과할 기회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아무 쓸모도 없다.
연로해지는 부모님께서도 가끔 주위에 사과하고 싶거나 용서하고 싶은 지인들과의 일들을 말씀하신다.
특히 젊었을 때 이런 저런 연유로 소원해진 인연들에 대해 많이 아쉬워하시는 것 같다.
부모님들 대신이라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나서서 용서를 구하거나 화해하고 싶은데 '길'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면 잘못한 일에 대해 솔직하게 용서를 구하는 일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인간답게 만드는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용서를 구하는 상대를 품어주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니 김대중 전대통령으로부터 새로운 과제물을 부여받은 느낌이다. (2010. 7. 30)
.....홍문종 생각
정치하는 사람 치고(호불호를 떠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본다. 특히나 큰 정치를 꿈꾼다면 반드시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할 정치인 중 최우선 순위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만큼 우리의 현대 정치사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서거 1주기를 맞아 세상에 나온 그의 ‘회고록’에 쏠리는 세간의 관심이 예사롭지 않다.
‘서자’ 신분이었던 출생의 비밀부터 YS와의 단일화 실패, 연예인 김미화에 대한 코멘트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세세하게 삶의 흔적을 담은 그의 회고록에서 특별히 내 눈길을 끄는 대목은 박근혜 전대표를 언급한 내용이었다.
실제로 김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 2004년 8월 정적(政敵)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자신을 찾아와 “아버지 시절에 여러 가지로 피해를 보고 고생하신 데 대해 딸로서 사과 말씀드립니다”라고 말한 일을 소개하면서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했다. 박정희가 환생해 내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아 기뻤다. 사과는 독재자의 딸이 했지만 정작 내가 구원을 받는 것 같았다”는 소회를 남겼다.
아버지를 대신한 박전대표의 사과에 구원을 받은 것만큼 기뻤다는 노정객의 솔직한 고백이 가슴에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용서와 화해가 그려내는 한편의 감동적인 대서사시를 보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인간을 동물과 차별화하는 정서 중에서 용서와 화해만큼 인간의 위대성을 부각시키는 기능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일상을 둘러보면 말처럼 수월하게 용서와 화해가 이뤄지는 건 아니다.
선뜻 사과하기도 그렇지만 용서 역시 쉽지 않은 현실을 감안하면 그렇다.
내게도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도저히 용서가 안되는 몇 몇의 인연이 있다. 지금으로서는 상대가 어떤 식의 사과를 한다 해도 쉽사리 포용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깊은 앙금이다.
그런데 박근혜 전대표의 사과와 관련한 김 전대통령의 술회는 (역사적 평가는 차치하고) 우리가 놓지 못하는 반목의 앙금들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용서’의 화두는 중복을 맞아 모인 가족모임에까지 따라붙었다. 작고한 지 5주기 째가 되는 동생 때문이었다.
동생은 지병으로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일기를 기록했는데 형인 내게 미처 말하지 못했던 심중의 이야기도 많이 담아 놓아 읽을 때마다 가슴을 짠하게 만들었다.
그 중 중학교 때 없어진 돈을 절대로 가져가지 않았다고 강조해 놓은 부분은 쉽사리 덜어낼 수 없을 마음의 짐이 되고 말았다. 동생에게 해 주지 못한 미안함 중에서 가장 무거운 무게로 말이다. 동생이 죽기 전에 말해주었더라면, 아니 내가 미리 사과할 기회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아무 쓸모도 없다.
연로해지는 부모님께서도 가끔 주위에 사과하고 싶거나 용서하고 싶은 지인들과의 일들을 말씀하신다.
특히 젊었을 때 이런 저런 연유로 소원해진 인연들에 대해 많이 아쉬워하시는 것 같다.
부모님들 대신이라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나서서 용서를 구하거나 화해하고 싶은데 '길'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면 잘못한 일에 대해 솔직하게 용서를 구하는 일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인간답게 만드는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용서를 구하는 상대를 품어주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니 김대중 전대통령으로부터 새로운 과제물을 부여받은 느낌이다. (2010. 7. 30)
.....홍문종 생각
2010년 7월 10일 토요일
홍문종생각-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품 인생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품 인생을
방학 때문에 생긴 여유를 세상살이에 쏟고 있는 요즈음이다.
그동안 바빠서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이나 특별히 나와 다르게 살아가는 이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의 삶이 거기서 거기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고 있다.
며칠 전 내 정치행로에 危害를 가하고 상처를 줬던 ‘사람’이 찾아왔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배신자라 칭하며 자신의 지난 죄상(?)을 고해성사했다. 본인은 숨겨진 그림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물론 많은 이들이 익히 알고 있던 일련의 음모들이 당사자의 입을 통해 재생됐다.
양심의 가책 때문인지 삶의 줄기를 쥐고자 하는 방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의 바닥을 송두리째 드러내 내게 내밀었다. 나를 배신했던 대가를 제대로 얻지 못했던 울분도 함께 보여줬다.
담담한 마음으로 그를 볼 수 있었다. 평정심의 발로라기보다 인간의 나약한 한계를 확인하게 되면서 전의를 상실하게 되는 그런 상황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주변인의 유고를 접하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한 끼 먹는 것조차 아까워하며 아등바등한 끝에 무일푼에서 엄청난 자산을 이뤘지만 암으로 세상을 떠난 A씨, 재력가의 아들로 태어나 유일한 취미가 돈쓰기이고 제일 열심히 한 일이 술 마시기로 꼽을 정도로 세상을 허탕하게 살다가 결국 술로 목숨을 잃은 B씨. 돈도 없고 배경도 없이 무색무취로 인생을 가늘게 이어가다가 흔적도 없이 죽어간 C씨,
이들이 남긴 삶의 궤적은 현격히 달랐지만 죽음이라는 종착역은 같았다. 아무리 특별해도 죽음 앞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자손에게 물려준 유산이 화근이 되어 상갓집이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경우도 인생을 돌아보게 만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만은 예외라는 생각으로 독특하고 특별한 삶의 주인공을 자처하며 살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부모님이나 이웃의 삶을 판박이로 반복하고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버둥거려도 인생이라는 건 어쩌면 자기만의 노래를 부르다 소멸되는 단순한 과정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인생이 결국 죽음을 향한 노정이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죽게’ 돼 있다면 어떻게 살든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고개를 든다. 선악의 가치기준이나 또 이에 따른 판단과 실천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문득 인생이 허무하다는 말에 공감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인생을 막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평생에 걸쳐 나를 관통하는 내 인생의 화두이기도 하다.
아쉽고 허무하다는 생각에만 방점을 찍는다면 그야말로 의미없는 삶이 되고 만다. 경계해야 할 현실이다. 허무하고 크게 다르지 않은 인생이라고 해도 결국은 나만의 인생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던 어차피 자기가 믿는 대로 살게 돼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던지 확실하고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발견한 아메리카 대륙을 죽을 까지 인도라고 믿었던 콜롬부스가 어떤 의미에서는 더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 중심의 이기적 사고로 봐서는 진리의 왜곡은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꿈을 향해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노력이 더 없이 소중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현실에서의 삶과 내세를 위한 삶, 둘 다를 충족시키는 가치관으로 인생을 꾸려나가겠다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된 배경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믿자.
나의 꿈을 믿자.
수많은 인생들이 앞서 불렀던 행복과 환희의 노래를 증거로 삼자.
지난 밤 번민의 터널을 뚫고 스스로에게 내민 ‘처방전’이 새로운 에너지로 다가온다.
여러 조건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극복하고 홍문종 만의 명품 인생을 만들기 위한 가열찬 정진을 지금부터 시작해야겠다. (2010 .7. 10)
....홍문종 생각
방학 때문에 생긴 여유를 세상살이에 쏟고 있는 요즈음이다.
그동안 바빠서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이나 특별히 나와 다르게 살아가는 이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의 삶이 거기서 거기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고 있다.
며칠 전 내 정치행로에 危害를 가하고 상처를 줬던 ‘사람’이 찾아왔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배신자라 칭하며 자신의 지난 죄상(?)을 고해성사했다. 본인은 숨겨진 그림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물론 많은 이들이 익히 알고 있던 일련의 음모들이 당사자의 입을 통해 재생됐다.
양심의 가책 때문인지 삶의 줄기를 쥐고자 하는 방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의 바닥을 송두리째 드러내 내게 내밀었다. 나를 배신했던 대가를 제대로 얻지 못했던 울분도 함께 보여줬다.
담담한 마음으로 그를 볼 수 있었다. 평정심의 발로라기보다 인간의 나약한 한계를 확인하게 되면서 전의를 상실하게 되는 그런 상황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주변인의 유고를 접하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한 끼 먹는 것조차 아까워하며 아등바등한 끝에 무일푼에서 엄청난 자산을 이뤘지만 암으로 세상을 떠난 A씨, 재력가의 아들로 태어나 유일한 취미가 돈쓰기이고 제일 열심히 한 일이 술 마시기로 꼽을 정도로 세상을 허탕하게 살다가 결국 술로 목숨을 잃은 B씨. 돈도 없고 배경도 없이 무색무취로 인생을 가늘게 이어가다가 흔적도 없이 죽어간 C씨,
이들이 남긴 삶의 궤적은 현격히 달랐지만 죽음이라는 종착역은 같았다. 아무리 특별해도 죽음 앞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자손에게 물려준 유산이 화근이 되어 상갓집이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경우도 인생을 돌아보게 만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만은 예외라는 생각으로 독특하고 특별한 삶의 주인공을 자처하며 살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부모님이나 이웃의 삶을 판박이로 반복하고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버둥거려도 인생이라는 건 어쩌면 자기만의 노래를 부르다 소멸되는 단순한 과정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인생이 결국 죽음을 향한 노정이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죽게’ 돼 있다면 어떻게 살든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고개를 든다. 선악의 가치기준이나 또 이에 따른 판단과 실천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문득 인생이 허무하다는 말에 공감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인생을 막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평생에 걸쳐 나를 관통하는 내 인생의 화두이기도 하다.
아쉽고 허무하다는 생각에만 방점을 찍는다면 그야말로 의미없는 삶이 되고 만다. 경계해야 할 현실이다. 허무하고 크게 다르지 않은 인생이라고 해도 결국은 나만의 인생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던 어차피 자기가 믿는 대로 살게 돼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던지 확실하고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발견한 아메리카 대륙을 죽을 까지 인도라고 믿었던 콜롬부스가 어떤 의미에서는 더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 중심의 이기적 사고로 봐서는 진리의 왜곡은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꿈을 향해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노력이 더 없이 소중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현실에서의 삶과 내세를 위한 삶, 둘 다를 충족시키는 가치관으로 인생을 꾸려나가겠다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된 배경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믿자.
나의 꿈을 믿자.
수많은 인생들이 앞서 불렀던 행복과 환희의 노래를 증거로 삼자.
지난 밤 번민의 터널을 뚫고 스스로에게 내민 ‘처방전’이 새로운 에너지로 다가온다.
여러 조건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극복하고 홍문종 만의 명품 인생을 만들기 위한 가열찬 정진을 지금부터 시작해야겠다. (2010 .7. 10)
....홍문종 생각
2010년 7월 8일 목요일
홍문종생각-블랙리스트
블랙리스트
개그우먼 김미화씨가 트위터를 통해 블랙리스트 의혹을 제기하자 KBS가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나서면서 논란을 키우고 있다. 과잉 대응이 아닐까 싶다. 긁어 부스럼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특별한 복안이 있다면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수순처럼 고발을 감행했다면 KBS의 패착이 분명하다. 우선 당장 진중권, 유창선 두 사람이 비슷한 경험을 내놓으며 가세하자 KBS에 대한 비난여론이 빠른 속도로 번지는 정황만 보아도 그렇다.
문제는 국민 여론이 권력 주변부에 깊은 불신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외압 시비는 비단 KBS 뿐 아니라 여타 사례를 통해서도 국민반감을 불러온 전력이 있다.
펄쩍 뛰며 결백을 주장하는 KBS보다 김미화의 하소연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역력한 작금의 상황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돼야 할 것이다.
국민에게 있어 입맛에 맞지 않은 인사들에 대한 권력 주변부의 압력행사 혐의는 거의 확신범 수준이다. 김미화의 ‘단발마’에 그토록 많은 사람을 반응하는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확신들이 이번 사건을 통해 김미화를 또 한 명의 김제동으로 복제시키고 있다. 평범한 개인을 힘 있는 반정부 인사로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앞서 비슷한 경로로 형성된 퇴출 인사들의 유명세가 민심에 어떤 식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가를 보라. 정치권의 러브콜 대상이 될 만큼 거물로 성장하지 않았는가.
한나라당이 총공세에 시달리며 수세에 몰리고 있는 걸 보면 트로이 목마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다.
국민여론이 KBS에 핵심세력이 주도하는 (유형이든 무형이든)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현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인보다 신뢰받지 못하는 공영방송의 암담한 현실을 목도하는 심정이 착잡하다.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이런 식의 구설은 집권당에 불리할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자칫 허명이라도 이름을 날릴 목적이나 이를 부축이는 세력에 의해 제2, 제3의 ‘블랙리스트’ 파동이 획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정황을 걱정해야 한다.
공영방송은 물론 정치적 중립이 담보돼야 할 조직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번 기회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영방송이 외부적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중립성과 공공성을 유지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체질 개선에 나서는 진정성을 보인다면 돌아선 국민의 마음을 얻게 될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 힘 있는 인사들의 각성과 역할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권력의 향방과 상관없이 공공성 유지가 가능한 항구적인 조직으로 거듭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확보해 보자.
트위터 세대를 따라잡을 수 있기 위한 기성세대의 고군분투가 필요한 상황이다.
정부의 트위터 세대에 대한 대응도 지금과는 많이 달라져야 한다. 인력도 별로 없는 검경이 이들을 따라잡겠다며 무조건 감시대상으로 몰고 가는 건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세대와의 공감대 확보는 물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새로운 아젠다나 컨텐츠 개발 등의 합리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젊은이들에게 기성세대의 장점을 본받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현란함에 빠져들지 않는 지혜도 요구된다.
때 마침 은평 재선거 국면에서 신경민 MBC 앵커가 이재오 전 권익위원장의 대항마로 거론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블랙리스트 파동이 정부 여당의 발목을 잡는 악재가 되지 않도록 지혜로운 처신이 뒤따라야겠다. 지난 지방선거의 악몽을 재현하는 촉발제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2010 . 7. 8)
....홍문종 생각
개그우먼 김미화씨가 트위터를 통해 블랙리스트 의혹을 제기하자 KBS가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나서면서 논란을 키우고 있다. 과잉 대응이 아닐까 싶다. 긁어 부스럼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특별한 복안이 있다면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수순처럼 고발을 감행했다면 KBS의 패착이 분명하다. 우선 당장 진중권, 유창선 두 사람이 비슷한 경험을 내놓으며 가세하자 KBS에 대한 비난여론이 빠른 속도로 번지는 정황만 보아도 그렇다.
문제는 국민 여론이 권력 주변부에 깊은 불신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외압 시비는 비단 KBS 뿐 아니라 여타 사례를 통해서도 국민반감을 불러온 전력이 있다.
펄쩍 뛰며 결백을 주장하는 KBS보다 김미화의 하소연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역력한 작금의 상황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돼야 할 것이다.
국민에게 있어 입맛에 맞지 않은 인사들에 대한 권력 주변부의 압력행사 혐의는 거의 확신범 수준이다. 김미화의 ‘단발마’에 그토록 많은 사람을 반응하는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확신들이 이번 사건을 통해 김미화를 또 한 명의 김제동으로 복제시키고 있다. 평범한 개인을 힘 있는 반정부 인사로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앞서 비슷한 경로로 형성된 퇴출 인사들의 유명세가 민심에 어떤 식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가를 보라. 정치권의 러브콜 대상이 될 만큼 거물로 성장하지 않았는가.
한나라당이 총공세에 시달리며 수세에 몰리고 있는 걸 보면 트로이 목마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다.
국민여론이 KBS에 핵심세력이 주도하는 (유형이든 무형이든)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현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인보다 신뢰받지 못하는 공영방송의 암담한 현실을 목도하는 심정이 착잡하다.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이런 식의 구설은 집권당에 불리할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자칫 허명이라도 이름을 날릴 목적이나 이를 부축이는 세력에 의해 제2, 제3의 ‘블랙리스트’ 파동이 획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정황을 걱정해야 한다.
공영방송은 물론 정치적 중립이 담보돼야 할 조직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번 기회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영방송이 외부적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중립성과 공공성을 유지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체질 개선에 나서는 진정성을 보인다면 돌아선 국민의 마음을 얻게 될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 힘 있는 인사들의 각성과 역할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권력의 향방과 상관없이 공공성 유지가 가능한 항구적인 조직으로 거듭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확보해 보자.
트위터 세대를 따라잡을 수 있기 위한 기성세대의 고군분투가 필요한 상황이다.
정부의 트위터 세대에 대한 대응도 지금과는 많이 달라져야 한다. 인력도 별로 없는 검경이 이들을 따라잡겠다며 무조건 감시대상으로 몰고 가는 건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세대와의 공감대 확보는 물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새로운 아젠다나 컨텐츠 개발 등의 합리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젊은이들에게 기성세대의 장점을 본받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현란함에 빠져들지 않는 지혜도 요구된다.
때 마침 은평 재선거 국면에서 신경민 MBC 앵커가 이재오 전 권익위원장의 대항마로 거론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블랙리스트 파동이 정부 여당의 발목을 잡는 악재가 되지 않도록 지혜로운 처신이 뒤따라야겠다. 지난 지방선거의 악몽을 재현하는 촉발제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2010 . 7. 8)
....홍문종 생각
2010년 6월 12일 토요일
홍문종생각-꿈을 낚는 進化
꿈을 낚는 進化
우연히 보수와 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논객으로 알려진 인사들이 출연한 TV 토론을 시청했다. 하지만 토론이라기보다 싸움을 방불케 하는 공방의 연속이어서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물론 전통성을 옹호하고 사회적 안정을 추구하는 보수와 사회적 변화와 발전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려는 진보와의 가치충돌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을 것이다. 적당한 경쟁이 국가 발전에 미치는 시너지 효과를 감안한다면 보혁 갈등을 비관적 관점으로만 판단할 일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때로는 이념 간 갈등이 건강한 사회적 담론을 견인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 못할 바도 없다.
다만 그 가치가 왜곡되거나 변질되는 상황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념의 대립구도가 국가나 공동체를 위한 가치실현보다 특정세력을 대변하는 차원이라면 자칫 국민이 특정세력을 위한 소도구로 전락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삼성경제연구소 최근 작성한 ‘지표로 본 한국의 선진화 수준’ 보고서에 따르면 ‘노블리스 오블리제’나 ‘사회안전망’ 분야에서 우리나라는 OECD 30개 국가 중 30위, 즉 꼴찌를 기록했다. 보수가 자신들의 밑천이라고 할 정통성도 명분도 깡그리 외면한 채 ‘깡통계좌’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셈이다.
오만함으로 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이 정황....국민에게 아무런 감동이나 흥미도 주지 못한 보수가 그나마 자신들의 사회적 책무인 도덕적 우월성마저 방기해 버렸다.
천안함 사건만 해도 보수진영은 정부의 바람잡이를 자처했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정부가 내놓는 일방적인 자료로 스스로의 입맛에 맞게 가공 활용하다가 오히려 역풍을 맞기도 했으니 꼴이 말이 아니게 됐다.
보수의 시대착오적 발상이 문제다. 이대로 계속 정체된 낡은 가치에 천착하다간 조만간 국민에게 버림받고 손가락질 당하는 처지로 전락하게 될까 싶은 두려움도 솔직히 있다. 아무래도 보수진영엔 어지간해서는 진정성을 전달하지 못하는 무감각, 무감동의 DNA가 퍼져있는 것 같다.
보수(더 정확히 진보적 보수)의 일원으로서 전통적인 보수의 가치만 주장해서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는 나는 갈수록 입지를 좁히고 있는 대한민국 보수의 미래가 걱정된다 . 진보주의적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보수의 가치는 발 붙일 곳을 찾기 어렵게 될 것이다.
살아남으려면 진화하는 보수가 돼야 한다. 그것이 시대정신이다.
논란의 쟁점을 양비론으로 우왕좌왕 하는 정도가 아닌 고리타분한 보수와 철없는 진보가 확실하게 환골탈태하는 수준으로 진화돼야 한다. 진보의 존재를 묵살하거나 날마다 분화하면서 새로워지는 진보의 열정을 살피지 않고서는 세상의 흐름을 간파할 수 없다. 세상을 리드할 자격도 없다. (이 대목은 미국 보수의 영원한 영웅으로 추앙받는 레이건의 소련붕괴 전략에서 입증된 바 있다. 레이건은 재집권 이후 강경일변도로 대했던 대소련 전략을 평화공세로 바꿨다. 그리고 그의 전략은 훗날 소련 붕괴를 이끌어낸 ‘70년 공산당사의 실험을 막을 내리게 된 역사적 전환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진보를 배척하고 도원 제패를 꿈꾸는 보수는 시대착오적 발상에 불과하다.
진정 시대정신이 보수의 가치 위에 세워야겠다고 확신한다면 진보에 대한 과감한 포용을 주저해서는 안된다. 보수의 안정된 영감으로 피끓는 진보의 열정을 담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리더십을 획득할 수 있다.
혹시 변절이니 기회주의자니 하는 무책임한 매도로 그나마 보수의 원대한 꿈이 붙인 희망의 불씨를 꺼버리는 일은 삼가길 바란다. 진보나 보수. 어느 한 쪽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 역시 지양하도록 하자. 자칫 선명성을 앞세워 민중을 혼란의 와중으로 몰아넣는 분열의 단초가 될까 걱정된다. 마땅히 경계해야 할 상황이다.
차분히 기도하는 심정으로 이 진화의 끈을 거머쥐도록 하자...
PS : 내 이념의 정체성을 진보적 보수로 정립하기까지 여러 스승과 책의 도움이 있었지만 특별히 고인이 되신 이수인 전의원과의 대화를 통해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한다. 오늘은 그의 10주기 추모일이다. 직접 찾지 못하고 조화로 애도의 마음을 대신했지만 온 종일 생전의 그와 나눴던 대화들이 그리웠다. 이 혼란한 시기에 꼭 필요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 그랬던 같다. (2010 .6.12)
....홍문종 생각
우연히 보수와 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논객으로 알려진 인사들이 출연한 TV 토론을 시청했다. 하지만 토론이라기보다 싸움을 방불케 하는 공방의 연속이어서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물론 전통성을 옹호하고 사회적 안정을 추구하는 보수와 사회적 변화와 발전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려는 진보와의 가치충돌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을 것이다. 적당한 경쟁이 국가 발전에 미치는 시너지 효과를 감안한다면 보혁 갈등을 비관적 관점으로만 판단할 일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때로는 이념 간 갈등이 건강한 사회적 담론을 견인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 못할 바도 없다.
다만 그 가치가 왜곡되거나 변질되는 상황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념의 대립구도가 국가나 공동체를 위한 가치실현보다 특정세력을 대변하는 차원이라면 자칫 국민이 특정세력을 위한 소도구로 전락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삼성경제연구소 최근 작성한 ‘지표로 본 한국의 선진화 수준’ 보고서에 따르면 ‘노블리스 오블리제’나 ‘사회안전망’ 분야에서 우리나라는 OECD 30개 국가 중 30위, 즉 꼴찌를 기록했다. 보수가 자신들의 밑천이라고 할 정통성도 명분도 깡그리 외면한 채 ‘깡통계좌’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셈이다.
오만함으로 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이 정황....국민에게 아무런 감동이나 흥미도 주지 못한 보수가 그나마 자신들의 사회적 책무인 도덕적 우월성마저 방기해 버렸다.
천안함 사건만 해도 보수진영은 정부의 바람잡이를 자처했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정부가 내놓는 일방적인 자료로 스스로의 입맛에 맞게 가공 활용하다가 오히려 역풍을 맞기도 했으니 꼴이 말이 아니게 됐다.
보수의 시대착오적 발상이 문제다. 이대로 계속 정체된 낡은 가치에 천착하다간 조만간 국민에게 버림받고 손가락질 당하는 처지로 전락하게 될까 싶은 두려움도 솔직히 있다. 아무래도 보수진영엔 어지간해서는 진정성을 전달하지 못하는 무감각, 무감동의 DNA가 퍼져있는 것 같다.
보수(더 정확히 진보적 보수)의 일원으로서 전통적인 보수의 가치만 주장해서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는 나는 갈수록 입지를 좁히고 있는 대한민국 보수의 미래가 걱정된다 . 진보주의적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보수의 가치는 발 붙일 곳을 찾기 어렵게 될 것이다.
살아남으려면 진화하는 보수가 돼야 한다. 그것이 시대정신이다.
논란의 쟁점을 양비론으로 우왕좌왕 하는 정도가 아닌 고리타분한 보수와 철없는 진보가 확실하게 환골탈태하는 수준으로 진화돼야 한다. 진보의 존재를 묵살하거나 날마다 분화하면서 새로워지는 진보의 열정을 살피지 않고서는 세상의 흐름을 간파할 수 없다. 세상을 리드할 자격도 없다. (이 대목은 미국 보수의 영원한 영웅으로 추앙받는 레이건의 소련붕괴 전략에서 입증된 바 있다. 레이건은 재집권 이후 강경일변도로 대했던 대소련 전략을 평화공세로 바꿨다. 그리고 그의 전략은 훗날 소련 붕괴를 이끌어낸 ‘70년 공산당사의 실험을 막을 내리게 된 역사적 전환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진보를 배척하고 도원 제패를 꿈꾸는 보수는 시대착오적 발상에 불과하다.
진정 시대정신이 보수의 가치 위에 세워야겠다고 확신한다면 진보에 대한 과감한 포용을 주저해서는 안된다. 보수의 안정된 영감으로 피끓는 진보의 열정을 담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리더십을 획득할 수 있다.
혹시 변절이니 기회주의자니 하는 무책임한 매도로 그나마 보수의 원대한 꿈이 붙인 희망의 불씨를 꺼버리는 일은 삼가길 바란다. 진보나 보수. 어느 한 쪽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 역시 지양하도록 하자. 자칫 선명성을 앞세워 민중을 혼란의 와중으로 몰아넣는 분열의 단초가 될까 걱정된다. 마땅히 경계해야 할 상황이다.
차분히 기도하는 심정으로 이 진화의 끈을 거머쥐도록 하자...
PS : 내 이념의 정체성을 진보적 보수로 정립하기까지 여러 스승과 책의 도움이 있었지만 특별히 고인이 되신 이수인 전의원과의 대화를 통해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한다. 오늘은 그의 10주기 추모일이다. 직접 찾지 못하고 조화로 애도의 마음을 대신했지만 온 종일 생전의 그와 나눴던 대화들이 그리웠다. 이 혼란한 시기에 꼭 필요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 그랬던 같다. (2010 .6.12)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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