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왕따였다
학교 폭력에 시달리던 어린 영혼의 자살 소식이 음울함의 두께를 더하는 세밑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드러나는 사건의 진상은 많은 이들을 마음의 감옥에 가두고 있다.
지옥이 따로 없다.
중학생들의 행위라고 하기엔 그 수법이 너무도 잔인하다.
폭행은 기본이고 심지어 전기선으로 목을 묶고 끌고 다니면서 과자 부스러기를 주워 먹게 하거나 물고문을 가하는 등 상상도 못할 짓으로 피해자를 괴롭힌 사실이 수사결과 밝혀지고 있다.
그렇게 석 달여 동안 진행된 33차례에 걸친 폭행과 174건의 협박 문자가 어린 영혼을 극단의 상황으로 몰고 갔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가해지던 위해는 고통 받던 피해자가 지옥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스스로의 삶을 지우는 선택을 하고나서 비로소 멈췄다.
무엇보다 끔찍한 건 덫에 걸린 어린 영혼이 발버둥 치던 그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그의 절망을 알아채지 못한 현실이다. 교육 당국은 물론 학교도 선생도 부모도 친구도 그 누구도 아이의 고통을 품어주지 못하고 방조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는 초중고생 규모가 3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는 언론 보도다.
예사롭지 않은 정황이다.
만일이라는 가정은 늘 후회스럽기 마련이지만 아이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던 기회가 무관심 때문에 무너진 상황이 가슴을 치게 만든다. 그렇게 아플 수가 없다.
만일 선생님이 교실에서 혼자 울고 있던 아이를 발견했던 그 순간, 그의 고통을 살피겠다는 의지를 조금만 더 키웠더라면 이 가슴 아픈 현실을 피할 수 있었을까 묻게 된다. 아무리 직장생활이 바쁘더라도 자식과 소통하고자 하는 부모의 관심이 중심을 잡고 있었다면 미래 희망에 들뜬 아이의 환한 표정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을 것이다.
사회적 책무 역시 마찬가지다. 툭하면 요즘 아이들 타령을 하면서도 그들의 굴절된 행위를 바로잡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비중을 두고 다루었던 가를 따져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국가도 결코 가볍지 않은 책무를 이행하기 위해 얼마만큼 노력했는지 살필 일이다.
파행으로 치닫는 일선 교육의 폐단에도 불구하고 피멍이 들고 죽어 넘어가도 속수무책인 국가가 무슨 신뢰로 국민들에게 출산을 장려하고 교육정책을 논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우리 모두가 어린 생명을 해친 공범인 것이다.
자기 일 외에는 관심이 없는 이기적 풍토가 벼랑 끝에 매달린 아이의 절박한 외침을 가로막았다. 현실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참으로 우리의 죄가 크다 할 것이다.
특히 무한책임을 져야 할 교육 현장에 있는 나로서는 더 없이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이다.
마음의 감옥에 갇히는 것만으로 면피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하겠다.
어릴 적 경험으로 왕따의 고통을 익히 알고 있다.
일찍이 적지 않게 학교를 옮겨 다녀야 했던 내가 감내해야 했던 의례적인 절차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가, 용산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수송초등학교로 전학을 간 적이 있다.
명문 중학교에 진학시키려던 부모님의 노력을 배경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내게는 쓴 추억으로 남아있는 인생의 한 페이지다. 학교를 옮기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공백기를 거쳐야 했는데 막상 학교 생활이 시작되자 사정없이 성적이 추락하는 복병을 만나게 된 것이다. 예상못한 후유증이었다.
그 전까지 우등생이었던 나로서는 실로 견디기 힘든 충격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왕따의 유탄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우등생이라는 프라이드를 잃은 상처를 쓰다듬을 틈도 없이 아직은 낯 설기만 한 친구들의 냉대를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선생님이고 친구들이고 내가 중심이었던 전 학교와는 너무나 다르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왕따로서의 나의 삶은 차라리 지옥이었다.
존재감 없는 전학생에서 왕따로 이어진 내 삶은 힘들어진 상황 빼고는 흥미없는 현실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았다.
그 때 마음 붙일 데 없이 겉돌면서 거의 날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자칫 했으면 지금의 나는 아마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숨통을 열어주고 흔쾌히 피난처가 되어준 가족이나 만화책, 그리고 교회와 동네 친구들의 존재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친구나 동생들과 함께 어울리거나 만화책을 보면서 아니면 어린이 주일학교를 통해 마음의 상처를 다독거릴 여유를 챙길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나마 치유할 기회를 실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그 긴 어둠의 터널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피해 학생 부모가 학교 당국과 가해학생 부모를 대상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모양이다.
미국의 지방정부가 비슷한 사례로 26억여원을 지급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만큼 어떤 형태로든 손해배상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국가에도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해마다 적지 않은 청춘들이 같은 이유로 유명을 달리하고 있건만 이를 수수방관해 온 국가의 배상 책임은 지극히 당연한 요구가 아닐 수 없다. 피해자 부모라고 예외를 둘 수 없다. 긴 세월동안 아들의 고통을 짚어내지 못한 죄가 결코 적지 않다.
가해 학생들을 괴물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의 모든 일탈이 어른으로부터 비롯됐다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다.
예전처럼 형제자매가 많은 것도 아니고 일하는 어머니가 늘다 보니 아이들을 거두는 손길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현실로 볼 때 무조건 매도할 수 만은 없다는 생각이다. 고민을 듣거나 위로해 줄 대상도 없는 요즘 아이들의 불운을 물질적 풍요가 다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 아이들이 인터넷 게임에 매달리게 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해 초래되는 갖가지 경고들은 무신경하게 처리되는 경향이 있다.
보호막 없이 방치된 아이들의 안위를 챙길 염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겠다.
특히 대화채널 부재가 사회적 문제로 야기된 지 이미 오래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다.
사후 약방문이긴 하지만 향후 재발되지 않도록 적절한 사회적 장치를 배려했으면 좋겠다.
학생들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안전장치로 대한민국의 21세기를 채워나가자.
"왕따 없는 그곳에선 행복한거니?"
어린 영혼의 명복을 빈다.
(2011. 12.30)
....홍문종 생각
2011년 12월 30일 금요일
2011년 12월 28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어느 날
어느 날
홍문종
오는 날은 모르고
어느 날은 눈오고
지난 날은 비오고
아주 먼 날은 해쬐고
하루는 특별한 날
누군가 세상에 날
사람들 모두의 날
기쁘고 또 즐거울 날
하루는 그러한 날
누구도 버려진 날
아무도 모르는 날
아프고 또 우울할 날
에헤라 세상사람들아
한백년 살고지고라아
어느날 기뻐살고라아
어느날 또 슬퍼지고라아
어느 날 가버린 날
어느 날 오오는 날
어느 날 신나는 날
어느 날 또 소침한 날
새로운 태양이 어느날
새하얀 눈발이 어느날
새파란 구름이 어느날
새빨간 쎈 우박이 어느날
기다리는 어느날
보내주는 어느날
참아주는 어느날
기약없는 또 어느날
(2011.12.28)
2011년 12월 23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어떤 인연
어떤 인연
언제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아 마주하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지인이 있다.
오늘 우연히 그를 만났는데 할 얘기가 있다고 차 한 잔 나누자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인연’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고 싶은 것이었다.
그는 군 복무 3년 동안 단 한 번의 휴가도 나가지 않을 정도로 군 생활에 열심을 다했다.
누군가의 지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국가에 최선을 바쳐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단다.
그런 그를 눈여겨보던 상관이 같은 부대 육군 대위였던 박지만씨에게 소개를 했고 그 인연으로 모 건설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는데 그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감사함을 가슴에 품는 계기가 됐다.
그러던 중 10년 전 우연히 박지만 씨의 누나인 박근혜 전 대표가 큰 뜻을 두고 있는 정황을 알게 되면서 동전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적지 않은 액수가 됐다.
그는 그 돈을 이번에 박 전 대표를 돕는데 사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비록 조그만 성공이지만 자신의 ‘오늘 날’은 좋은 인연을 맺은 좋은 사람들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은 덕분이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고 나 역시 자신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라는 게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결론이었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의 진심을 받아들였는데 에너지가 잔뜩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의정부중학교 동창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사람사이의 인연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같은 동창 중에도 좋은 영향을 주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나쁜 영향을 주는 친구가 있다. 좋은 친구들이 모이면 좋은 결과가 배로 쌓이지만 나쁜 인연은 정 반대로 상처를 주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리 의정부중학교 동창들은 수십 년 째 무탈하게 좋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는 자부심이 주를 이루는 대화였다.
무엇보다 친구의 정겨운 표정이 세상을 살아가는 뒷심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시간이 되었다.
일전에도 밝힌 적이 있지만 나는 의정부 중학교를 입학해서 서울 대광중학교를 졸업했다. 도중에 서울로 전학을 간 나는 엄밀하게 따지자면 동창회에서 성골(?)성분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도 언제나 변함없이 나를 반겨주는 친구들이 고맙다.
해가 갈수록 그들의 존재가 소중해지는 걸 보면 우리가 좋은 인연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숱한 인연을 접하게 된다.
선한 인연도 만나고 악한 인연도 만난다. 좋은 인연인 것 같으면서도 나쁜 인연이 되고 나쁜 인연인 줄 알았는데 좋은 인연으로 매듭짓게 되는 경우도 많다. 마음먹은 대로 조절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다만 좋은 인연 나쁜 인연 가리기에 앞서 저마다 상대방에게 소중한 인연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스스로의 노력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은 우리에게 어떤 인연일까를 생각해 본다.
남한에서 본 북한과 북한에서 본 남한은 늘 상반된 시각으로 서로의 존재를 인지한다.
물론 남한은 보수냐 진보냐에 따라, 북한은 김정일 왕당파냐, 일반 주민이냐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조문’ 행위 하나도 같은 마음이 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 서로 간에 얼마나 깊은 골을 형성하고 있는 지 알 수 있다.
비단 조문 건 뿐만이 아니다. 사사건건 남한이 북한을, 북한이 남한을 수용하지 못하는 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그만큼 남과 북은 서로에게 특수한 상황이고 까다로운 상대일 수 밖에 없다.
돌이켜보면 외세와 손잡았던 역사의 불유쾌한 흔적이 적지 않다.
신라는 삼국 통일을 위해 당나라를 끌어들였고 백제는 일본을, 고구려는 만주를 끌어들였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게 된 우리의 서글픈 운명도 그런 식으로 이뤄졌다.
우리가 미국을, 북한이 중국을 등에 업고 그어놓은 38선이 60년 세월이 훌쩍 넘도록 두 동강이 난 한반도를 혈육을 그리워하는 애끓는 한으로 가득 채우고 있는 현실이다.
미국이나 중국과의 관계가 아무리 중요한 들 남북한의 인연만큼 더 소중하고 의미 있는 인연이 존재할까 싶다.
이제는 긍정적인 인연이 되기 위한 남북의 인위적인 노력이 필요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다. 우리의 적극적인 역할이 남북간 경색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2011년이 또 지나가고 있다.
흰 눈까지 더하니 저무는 한 해가 더 실감나게 느껴지는 이 밤이다.
돌아보니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인연을 맺었다.
그 중에는 좋은 인연도 있고 아쉬운 인연도 있다. 모두가 소중한 인연들이다.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좋은 인연들에게는 깊은 감사를, 아쉬운 인연들에게는 좀 더 최선을 다하자는 다짐을 날리는 눈발 속에 새겨본다.
(2011. 12. 23)
..홍문종 생각
언제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아 마주하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지인이 있다.
오늘 우연히 그를 만났는데 할 얘기가 있다고 차 한 잔 나누자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인연’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고 싶은 것이었다.
그는 군 복무 3년 동안 단 한 번의 휴가도 나가지 않을 정도로 군 생활에 열심을 다했다.
누군가의 지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국가에 최선을 바쳐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단다.
그런 그를 눈여겨보던 상관이 같은 부대 육군 대위였던 박지만씨에게 소개를 했고 그 인연으로 모 건설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는데 그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감사함을 가슴에 품는 계기가 됐다.
그러던 중 10년 전 우연히 박지만 씨의 누나인 박근혜 전 대표가 큰 뜻을 두고 있는 정황을 알게 되면서 동전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적지 않은 액수가 됐다.
그는 그 돈을 이번에 박 전 대표를 돕는데 사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비록 조그만 성공이지만 자신의 ‘오늘 날’은 좋은 인연을 맺은 좋은 사람들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은 덕분이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고 나 역시 자신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라는 게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결론이었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의 진심을 받아들였는데 에너지가 잔뜩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의정부중학교 동창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사람사이의 인연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같은 동창 중에도 좋은 영향을 주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나쁜 영향을 주는 친구가 있다. 좋은 친구들이 모이면 좋은 결과가 배로 쌓이지만 나쁜 인연은 정 반대로 상처를 주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리 의정부중학교 동창들은 수십 년 째 무탈하게 좋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는 자부심이 주를 이루는 대화였다.
무엇보다 친구의 정겨운 표정이 세상을 살아가는 뒷심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시간이 되었다.
일전에도 밝힌 적이 있지만 나는 의정부 중학교를 입학해서 서울 대광중학교를 졸업했다. 도중에 서울로 전학을 간 나는 엄밀하게 따지자면 동창회에서 성골(?)성분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도 언제나 변함없이 나를 반겨주는 친구들이 고맙다.
해가 갈수록 그들의 존재가 소중해지는 걸 보면 우리가 좋은 인연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숱한 인연을 접하게 된다.
선한 인연도 만나고 악한 인연도 만난다. 좋은 인연인 것 같으면서도 나쁜 인연이 되고 나쁜 인연인 줄 알았는데 좋은 인연으로 매듭짓게 되는 경우도 많다. 마음먹은 대로 조절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다만 좋은 인연 나쁜 인연 가리기에 앞서 저마다 상대방에게 소중한 인연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스스로의 노력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은 우리에게 어떤 인연일까를 생각해 본다.
남한에서 본 북한과 북한에서 본 남한은 늘 상반된 시각으로 서로의 존재를 인지한다.
물론 남한은 보수냐 진보냐에 따라, 북한은 김정일 왕당파냐, 일반 주민이냐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조문’ 행위 하나도 같은 마음이 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 서로 간에 얼마나 깊은 골을 형성하고 있는 지 알 수 있다.
비단 조문 건 뿐만이 아니다. 사사건건 남한이 북한을, 북한이 남한을 수용하지 못하는 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그만큼 남과 북은 서로에게 특수한 상황이고 까다로운 상대일 수 밖에 없다.
돌이켜보면 외세와 손잡았던 역사의 불유쾌한 흔적이 적지 않다.
신라는 삼국 통일을 위해 당나라를 끌어들였고 백제는 일본을, 고구려는 만주를 끌어들였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게 된 우리의 서글픈 운명도 그런 식으로 이뤄졌다.
우리가 미국을, 북한이 중국을 등에 업고 그어놓은 38선이 60년 세월이 훌쩍 넘도록 두 동강이 난 한반도를 혈육을 그리워하는 애끓는 한으로 가득 채우고 있는 현실이다.
미국이나 중국과의 관계가 아무리 중요한 들 남북한의 인연만큼 더 소중하고 의미 있는 인연이 존재할까 싶다.
이제는 긍정적인 인연이 되기 위한 남북의 인위적인 노력이 필요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다. 우리의 적극적인 역할이 남북간 경색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2011년이 또 지나가고 있다.
흰 눈까지 더하니 저무는 한 해가 더 실감나게 느껴지는 이 밤이다.
돌아보니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인연을 맺었다.
그 중에는 좋은 인연도 있고 아쉬운 인연도 있다. 모두가 소중한 인연들이다.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좋은 인연들에게는 깊은 감사를, 아쉬운 인연들에게는 좀 더 최선을 다하자는 다짐을 날리는 눈발 속에 새겨본다.
(2011. 12. 23)
..홍문종 생각
2011년 12월 20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엄이도종(掩耳盜鐘)
엄이도종(掩耳盜鐘)
어렸을 때 ‘김일성’은 절대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인이 됐고 이제 그의 뒤를 이은 아들 ‘김정일’의 돌연사가 지구촌을 달구고 있다.
허를 찔린 기분으로 '김정일' 사망소식을 접했다.
죽음 앞에서 왜소한 실체를 드러낸 본연의 모습이 주는 순간적인 당혹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건강에 문제가 있었다고 하지만 70도 못 넘기고 이렇게 일찍 삶을 마감할 줄은 몰랐다.
저녁 자리에서도 당연히 김정일 사망이 중심 화두가 됐다.
그의 사후 펼쳐질 한반도의 대 격랑, 통일한국의 미래, 김정일 사망을 둘러싼 음모 설, 김정은, 김정남 등 형제들의 갈등 기류 등 예상 가능한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결국은 죽게 돼 있는 삶의 한계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애써 죽음을 인식하지 않으려 담담한 눈빛을 위장하는 허세도 의외로 많이 만나게 된다.
하루를 살면 하루만큼, 이틀을 살면 이틀만큼 가까워지는 죽음의 종착역, 그것이 인생인데 우매한 인간은 마치 천년만년 살 것처럼 한치 앞도 못 내다 보고 탐욕을 부린다.
어찌 보면 인간의 서글픈 숙명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주어진 삶의 시간을 다 소진하면 종착지에 도달하게 돼 있으니 죽음만큼 공평한 게 없는 것 같다.
왕후장상의 삶이나 촌부의 무지렁이 삶이나 예외 없이 죽음과 마주하는 현실은 우리가 일상으로 목도하는 결론이다.
얼마 전 호암 이병철 회장이 타계 한 달 전, 정의채 신부에게 종교와 관련해 ‘24개 항목의 질의’를 던진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됐다. 정작 질문을 던진 당사자는 듣지 못한 답변이 36년이 지난 지금 한권의 책으로 나오게 됐다는 언론 보도를 통해서다. 당시 고인이 소폐암 폐암 투병 막바지였던 정황을 감안해 볼 때 그의 의문은 ‘신의 존재에 대한 깊은 천착’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을 목전에 둔 인간이 품었음직한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의 표출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 총수조차도 죽음 앞에서는 범부의 수준을 뛰어넘지 못했던 것이다.
정말 죽음 앞에선 누구도 특별하지 않다.
일행과 함께 하던 스님 한 분이 무심히 던진 말이 화두가 됐다.
인간이 자신의 죽는 시점을 정확히 알 수 있다면 삶의 마무리를 조금은 다르게, 더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을 거라는 말씀이었는데 사람들 가슴에 깊은 울림을 남긴 것이다.
포악한 독재자, 실패한 전제군주의 이미지 때문인지 김정일의 죽음이 섭섭하거나 애잔한 정서로 다가오지 않는다. 다만 그가 자신의 죽음을 얼마나 예견하고 있었는지, 살아생전 스스로가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 충분히 성찰했는지, 자신의 행위에 따른 시시비비를 가려본 적이 있는지, 무엇보다도 정작 본인은 역사와 민족 앞에서 성군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또 그럴 자신감은 있었는지 그런 것들이 궁금할 뿐이다.
김정일 자신은 절대권력을 행사하면서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참담한 생활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 실태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대로다. 아사한 북한 주민 수가 3,4백만 명에 이르고 정치범 수용소에서 재판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주민들이 넘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문득 궁금해진다. 김정일이 이토록 허망하게 세상 무대에서 사라질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았다면 북한사회는 지금과 많이 다른 모습이었을까?
그가 조국에 대한 뜨거운 마음으로 현실을 안타까워했던 지도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벤츠나 양주, 그리고 기쁨조에 미쳐 권력 유지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던 극단적 패륜아로 보이지만 결국 역사가 기록해야 할 텐데 정확성을 담보할 수 없는 현실이 더 없이 아쉽다.
어느 정권이나 소통 부재가 문제시 되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교수신문이 집어낸 올해의 사자성어, 엄이도종'(掩耳盜鐘ㆍ귀를 막고 종을 훔친다)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불통의 불합리함을 개선하려는 의지 없이 따로국밥으로 가고 있는 정권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지적했다. 작년 사자성어는 장두노미'(藏頭露尾)였다. 경고해도 개선점을 보이지 않는 정부의 불통에 올해엔 더 강력한 메시지로 질타를 가한 셈이다.
그나저나 내년 이맘때에는 좀 더 긍정적이고 모두에게 행복감을 안겨주는 사자성어가 선정되었으면 좋겠다.
PS: 김정일 조문을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지나 본데 개인적으로는 조문에 신중한 찬성표를 던진다. 대대적이거나 공식적인 방법이 아니라도 조문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지 않겠는가. 누가 됐건 어떤 상황에서라도 망자는 망자이다.
(2011.12.20.)
....홍문종 생각
어렸을 때 ‘김일성’은 절대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인이 됐고 이제 그의 뒤를 이은 아들 ‘김정일’의 돌연사가 지구촌을 달구고 있다.
허를 찔린 기분으로 '김정일' 사망소식을 접했다.
죽음 앞에서 왜소한 실체를 드러낸 본연의 모습이 주는 순간적인 당혹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건강에 문제가 있었다고 하지만 70도 못 넘기고 이렇게 일찍 삶을 마감할 줄은 몰랐다.
저녁 자리에서도 당연히 김정일 사망이 중심 화두가 됐다.
그의 사후 펼쳐질 한반도의 대 격랑, 통일한국의 미래, 김정일 사망을 둘러싼 음모 설, 김정은, 김정남 등 형제들의 갈등 기류 등 예상 가능한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결국은 죽게 돼 있는 삶의 한계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애써 죽음을 인식하지 않으려 담담한 눈빛을 위장하는 허세도 의외로 많이 만나게 된다.
하루를 살면 하루만큼, 이틀을 살면 이틀만큼 가까워지는 죽음의 종착역, 그것이 인생인데 우매한 인간은 마치 천년만년 살 것처럼 한치 앞도 못 내다 보고 탐욕을 부린다.
어찌 보면 인간의 서글픈 숙명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주어진 삶의 시간을 다 소진하면 종착지에 도달하게 돼 있으니 죽음만큼 공평한 게 없는 것 같다.
왕후장상의 삶이나 촌부의 무지렁이 삶이나 예외 없이 죽음과 마주하는 현실은 우리가 일상으로 목도하는 결론이다.
얼마 전 호암 이병철 회장이 타계 한 달 전, 정의채 신부에게 종교와 관련해 ‘24개 항목의 질의’를 던진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됐다. 정작 질문을 던진 당사자는 듣지 못한 답변이 36년이 지난 지금 한권의 책으로 나오게 됐다는 언론 보도를 통해서다. 당시 고인이 소폐암 폐암 투병 막바지였던 정황을 감안해 볼 때 그의 의문은 ‘신의 존재에 대한 깊은 천착’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을 목전에 둔 인간이 품었음직한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의 표출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 총수조차도 죽음 앞에서는 범부의 수준을 뛰어넘지 못했던 것이다.
정말 죽음 앞에선 누구도 특별하지 않다.
일행과 함께 하던 스님 한 분이 무심히 던진 말이 화두가 됐다.
인간이 자신의 죽는 시점을 정확히 알 수 있다면 삶의 마무리를 조금은 다르게, 더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을 거라는 말씀이었는데 사람들 가슴에 깊은 울림을 남긴 것이다.
포악한 독재자, 실패한 전제군주의 이미지 때문인지 김정일의 죽음이 섭섭하거나 애잔한 정서로 다가오지 않는다. 다만 그가 자신의 죽음을 얼마나 예견하고 있었는지, 살아생전 스스로가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 충분히 성찰했는지, 자신의 행위에 따른 시시비비를 가려본 적이 있는지, 무엇보다도 정작 본인은 역사와 민족 앞에서 성군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또 그럴 자신감은 있었는지 그런 것들이 궁금할 뿐이다.
김정일 자신은 절대권력을 행사하면서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참담한 생활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 실태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대로다. 아사한 북한 주민 수가 3,4백만 명에 이르고 정치범 수용소에서 재판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주민들이 넘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문득 궁금해진다. 김정일이 이토록 허망하게 세상 무대에서 사라질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았다면 북한사회는 지금과 많이 다른 모습이었을까?
그가 조국에 대한 뜨거운 마음으로 현실을 안타까워했던 지도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벤츠나 양주, 그리고 기쁨조에 미쳐 권력 유지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던 극단적 패륜아로 보이지만 결국 역사가 기록해야 할 텐데 정확성을 담보할 수 없는 현실이 더 없이 아쉽다.
어느 정권이나 소통 부재가 문제시 되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교수신문이 집어낸 올해의 사자성어, 엄이도종'(掩耳盜鐘ㆍ귀를 막고 종을 훔친다)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불통의 불합리함을 개선하려는 의지 없이 따로국밥으로 가고 있는 정권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지적했다. 작년 사자성어는 장두노미'(藏頭露尾)였다. 경고해도 개선점을 보이지 않는 정부의 불통에 올해엔 더 강력한 메시지로 질타를 가한 셈이다.
그나저나 내년 이맘때에는 좀 더 긍정적이고 모두에게 행복감을 안겨주는 사자성어가 선정되었으면 좋겠다.
PS: 김정일 조문을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지나 본데 개인적으로는 조문에 신중한 찬성표를 던진다. 대대적이거나 공식적인 방법이 아니라도 조문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지 않겠는가. 누가 됐건 어떤 상황에서라도 망자는 망자이다.
(2011.12.20.)
....홍문종 생각
2011년 12월 17일 토요일
홍문종 생각 - 물안개
미소띤 당신은
수줍음 먹음고
물가의 안개는
가슴 떨리는 연정
은빛깔 딩신은
내마음 흔들고
촉촉한 안개는
맑은 눈망울 호소
애틋한 당신은
어울려 춤추며
잡힐듯 안개는
작은 어깨춤 흥취
청초한 당신은
남몰래 간질고
숨어진 안개는
나의 사랑의 노래
(2011.12.17)
****無爛凱(무란개).... 물안개를 소리나는 대로 표기해 보았음.
2011년 12월 16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살해된 국권
살해된 국권
불법 조업을 단속하던 우리 해경이 중국 어민에 살해당하는 어이없는 사건이 벌어진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사건 발생 이후 중국 여론은 이해할 수 없는 반응으로 우리의 심기를 자극했다.
(뭘 잘했다고) 해커들이 몰려와 한국 사이트를 공격하는 가하면 주중 한국대사관에 쇠구슬이 날아들어 유리창이 파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국 언론도 안하무인격인 여론과 다를 바 없었다.
특히 중국 내 유력 매체인 환구시보(環球時報)는 ‘살해 증거가 없다’며 발뺌하는 건 물론 이번 사건의 책임이 마치 우리 측에 있는 것처럼 공격적인 논조로 일관했다. (한국이) ‘별거 아닌 죽음’으로 부화뇌동 한다는 식의 주장으로 우리국민을 부글거리게 했다.
그러다 달라지기 시작한 건 중국 외교부의 ‘뒤늦은’ 유감이 표명되면서부터다.
자성론을 촉구하는 중국사회 여론이 강경하던 언론의 논조를 누그러뜨리며 견인하는 양상이다.
강경 일변도이던 환구시보도 확연히 달라진 논조를 들고 나왔다.
한국에 대한 불법조업이 근절되지 않는 배경과 관련해 중국어민의 불우한 환경을 설명하는 읍소(?)로 이해를 구하는 가하면 한국인에 비해 가난하고 평균교육 수준도 크게 떨어지는 중국 어민의 불법 조업을, 오만함이 아니라 생계를 위한 차원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중국이 한국을 존중하니까 약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강경책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며 자제를 당부하기도 했다. 한국 축구나 한국 문화에 호감을 갖고 있다는 아부도 잊지 않았다.
외교부의 안일한 대응도 논란을 자초했다.
외교부의 적절하지 못한 처신이 발단이 된 것이다. 외교부는 이번 사건의 대응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중국이 일본과의 어로분쟁에서 압승한 ‘희토류 사건’을 해외 사례로 내놓았다. 희토류 사건이 나오토 내각 총사퇴의 결정적 역할을 했고 일본의 대표적인 대중국 굴욕외교 사건으로 낙인찍혀있는 만큼 적절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외교부가 중국의 힘 앞에 지레 굴복, 패배주의적 사고에 빠졌다는 여론의 비난이 과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아도 사건 직후 중국대사를 불러놓고도 ‘유감 요구’를 하지 않았다는 여론의 반발을 샀었다. 물론 복잡한 셈법을 적용해야 하는 외교의 애로를 모르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여론을 의식한 외교부의 몇몇 선택들은 유감일 수먼저 헤아려야 할 절차를 생략해서 국민적 자존심에 손상을 줬다.
중국과 한국은 역사적으로 떼어내려야 떼어낼 수 없는 관계를 이어왔다.
서로의 역사적 고비마다 함께 했던 순간이 적지 않다. 지금도 6자 회담 테이블에 같이 앉아 대한민국 미래를 논의할 정도로 오래 묵은 파트너십을 공유하는 사이다.
그러나 일본과의 관계가 그렇듯 중국과도 우호적이고 생산적인 관계는 분명 아니다.
중국의 동북공정만 해도 사사건건 억지논리로 우리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장벽임에 틀림없다.
그래서인지 어쩌다 스포츠 경기라도 맞붙게 되는 날이면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다. 그 어떤 상대국 보다 더 승부에 집착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기가 어렵지 않다.
우리 형편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아직 멀었다는 판단이다.
1000번이나 집회를 갖고 사과를 요구하는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를 외면하는 일본의 오만한 태도만 해도 그렇다. 사과는커녕 오히려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억지를 쓰고 있다. 중국 역시 우리가 강자였다면 이번 사건 과정에서 방약무도한 태도로 우리의 국권을 조롱하는 몰염치한 행동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도둑질을 하다가 이를 제지하는 경찰을 죽여놓고도, 가장을 잃고 오열하는 가족의 아픔에 위로를 전하는 최소한의 예의조차 저버리는 무례함을 범했다. 우리의 국권을 유린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이번 사건이 개인에 대한 살인이 아닌 대한민국 국권의 살해 사건으로 해석돼야 하는 이유다.
반면 인접한 이웃끼리 생산적인 코드로 상생에너지로 서로를 키워가는 국가도 있다.
나라마다 속사정은 있겠지만 상대방을 하대하거나 속이는 일로 얼굴을 붉힐 일이 없고 해묵은 감정이 서로의 진로를 막는 일도 없다.
미국과 케나다의 경우, 월드 시리즈를 함께 하고 전화번호도 공유하는 등 거의 한나라처럼 우의를 다지고 있다. 그런 나라들이 부러울 때가 많다. 미국은 멕시코와도 합리적인 관계다. 밀입국 문제도 야기될 수 있고 마약 밀수 역시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하지만 우호적이고 선의의 상생을 유도하는 교류가 양국 사이에 시너지로 작용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나마 이 정도로 중국이나 일본에 대접을 받고 있는 건 우리의 국력과 무관하지 않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는 아무래도 약육강식의 법칙이 가장 민감하게 작용하는 안테나가 되는 점을 감안하면 말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결국 우리에게는 남북통일과 국력 신장이 답이다.
세상을 주도하고 바꾸겠다는 계획을 실천하려면 힘과 능력부터 길러야겠다는 각오를 다져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언감생심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 자체를 던져버리겠다는 절박함으로 매달리자.
우리끼리 싸우며 국력을 소진하는 어리석음은 버리자. 스스로를 무장해제하는 어리석은 짓은 피하도록 하자. 올해 안으로 싸움을 멈추고 양보와 타협으로 재무장의 토대를 만들수 있도록 하자.
그것이 무시무시한 나라들 틈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니까.
도대체 무엇에 기인한 문제인지 앞으로 어떤 식으로 해결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자.
그렇게 저마다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 2012년은 용처럼 승천하는 대한민국이 되도록 어디 한 번 신명나게 어울려보도록 하자.
(2011.12.16.)
....홍문종 생각
불법 조업을 단속하던 우리 해경이 중국 어민에 살해당하는 어이없는 사건이 벌어진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사건 발생 이후 중국 여론은 이해할 수 없는 반응으로 우리의 심기를 자극했다.
(뭘 잘했다고) 해커들이 몰려와 한국 사이트를 공격하는 가하면 주중 한국대사관에 쇠구슬이 날아들어 유리창이 파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국 언론도 안하무인격인 여론과 다를 바 없었다.
특히 중국 내 유력 매체인 환구시보(環球時報)는 ‘살해 증거가 없다’며 발뺌하는 건 물론 이번 사건의 책임이 마치 우리 측에 있는 것처럼 공격적인 논조로 일관했다. (한국이) ‘별거 아닌 죽음’으로 부화뇌동 한다는 식의 주장으로 우리국민을 부글거리게 했다.
그러다 달라지기 시작한 건 중국 외교부의 ‘뒤늦은’ 유감이 표명되면서부터다.
자성론을 촉구하는 중국사회 여론이 강경하던 언론의 논조를 누그러뜨리며 견인하는 양상이다.
강경 일변도이던 환구시보도 확연히 달라진 논조를 들고 나왔다.
한국에 대한 불법조업이 근절되지 않는 배경과 관련해 중국어민의 불우한 환경을 설명하는 읍소(?)로 이해를 구하는 가하면 한국인에 비해 가난하고 평균교육 수준도 크게 떨어지는 중국 어민의 불법 조업을, 오만함이 아니라 생계를 위한 차원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중국이 한국을 존중하니까 약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강경책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며 자제를 당부하기도 했다. 한국 축구나 한국 문화에 호감을 갖고 있다는 아부도 잊지 않았다.
외교부의 안일한 대응도 논란을 자초했다.
외교부의 적절하지 못한 처신이 발단이 된 것이다. 외교부는 이번 사건의 대응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중국이 일본과의 어로분쟁에서 압승한 ‘희토류 사건’을 해외 사례로 내놓았다. 희토류 사건이 나오토 내각 총사퇴의 결정적 역할을 했고 일본의 대표적인 대중국 굴욕외교 사건으로 낙인찍혀있는 만큼 적절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외교부가 중국의 힘 앞에 지레 굴복, 패배주의적 사고에 빠졌다는 여론의 비난이 과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아도 사건 직후 중국대사를 불러놓고도 ‘유감 요구’를 하지 않았다는 여론의 반발을 샀었다. 물론 복잡한 셈법을 적용해야 하는 외교의 애로를 모르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여론을 의식한 외교부의 몇몇 선택들은 유감일 수먼저 헤아려야 할 절차를 생략해서 국민적 자존심에 손상을 줬다.
중국과 한국은 역사적으로 떼어내려야 떼어낼 수 없는 관계를 이어왔다.
서로의 역사적 고비마다 함께 했던 순간이 적지 않다. 지금도 6자 회담 테이블에 같이 앉아 대한민국 미래를 논의할 정도로 오래 묵은 파트너십을 공유하는 사이다.
그러나 일본과의 관계가 그렇듯 중국과도 우호적이고 생산적인 관계는 분명 아니다.
중국의 동북공정만 해도 사사건건 억지논리로 우리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장벽임에 틀림없다.
그래서인지 어쩌다 스포츠 경기라도 맞붙게 되는 날이면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다. 그 어떤 상대국 보다 더 승부에 집착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기가 어렵지 않다.
우리 형편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아직 멀었다는 판단이다.
1000번이나 집회를 갖고 사과를 요구하는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를 외면하는 일본의 오만한 태도만 해도 그렇다. 사과는커녕 오히려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억지를 쓰고 있다. 중국 역시 우리가 강자였다면 이번 사건 과정에서 방약무도한 태도로 우리의 국권을 조롱하는 몰염치한 행동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도둑질을 하다가 이를 제지하는 경찰을 죽여놓고도, 가장을 잃고 오열하는 가족의 아픔에 위로를 전하는 최소한의 예의조차 저버리는 무례함을 범했다. 우리의 국권을 유린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이번 사건이 개인에 대한 살인이 아닌 대한민국 국권의 살해 사건으로 해석돼야 하는 이유다.
반면 인접한 이웃끼리 생산적인 코드로 상생에너지로 서로를 키워가는 국가도 있다.
나라마다 속사정은 있겠지만 상대방을 하대하거나 속이는 일로 얼굴을 붉힐 일이 없고 해묵은 감정이 서로의 진로를 막는 일도 없다.
미국과 케나다의 경우, 월드 시리즈를 함께 하고 전화번호도 공유하는 등 거의 한나라처럼 우의를 다지고 있다. 그런 나라들이 부러울 때가 많다. 미국은 멕시코와도 합리적인 관계다. 밀입국 문제도 야기될 수 있고 마약 밀수 역시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하지만 우호적이고 선의의 상생을 유도하는 교류가 양국 사이에 시너지로 작용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나마 이 정도로 중국이나 일본에 대접을 받고 있는 건 우리의 국력과 무관하지 않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는 아무래도 약육강식의 법칙이 가장 민감하게 작용하는 안테나가 되는 점을 감안하면 말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결국 우리에게는 남북통일과 국력 신장이 답이다.
세상을 주도하고 바꾸겠다는 계획을 실천하려면 힘과 능력부터 길러야겠다는 각오를 다져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언감생심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 자체를 던져버리겠다는 절박함으로 매달리자.
우리끼리 싸우며 국력을 소진하는 어리석음은 버리자. 스스로를 무장해제하는 어리석은 짓은 피하도록 하자. 올해 안으로 싸움을 멈추고 양보와 타협으로 재무장의 토대를 만들수 있도록 하자.
그것이 무시무시한 나라들 틈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니까.
도대체 무엇에 기인한 문제인지 앞으로 어떤 식으로 해결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자.
그렇게 저마다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 2012년은 용처럼 승천하는 대한민국이 되도록 어디 한 번 신명나게 어울려보도록 하자.
(2011.12.16.)
....홍문종 생각
2011년 12월 15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나누면 커진다
나누면 커진다
12월이 깊어가고 있다.
어깨를 움츠리게 하는 추위가 마지막 장으로 남은 달력의 황량함을 보태는 겨울이다.
이웃의 남루함이 유난히 아프게 다가오는 계절이기도 하다.
거리 곳곳에서 자선냄비를 채우는 손길들이 분주하다. 나눔과 배려로 불우한 이웃을 품고자 하는 반갑고 귀한 발걸음도 줄을 잇고 있다.
나누면 커지는 인생의 비밀을 실천하는 그곳에서 희망의 불꽃을 본다.
이웃의 고통에 마음을 여는 이들이 있는 한 세상은 여전히 살만하다는 생각이다.
내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출사표가 줄을 잇는 요즈음 국가와 민족을 위한 봉사와 헌신의 다짐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선거현장에서 남발되는 봉사 약속은 대부분 유권자 구애를 위한 미끼 용도에 그쳤다. 말로만 하는 봉사가 제일 나쁘다는데 바로 그런 행태를 보인 셈이다.
그렇지 않아도 칭찬거리가 변변치 않은 정치판에서 정치 입문을 꿈꾸는 사람들조차 구태를 답습하고 있어 큰일이다. 말로만 하는 구태를 청산하지 못한다면 사회적 분열은 물론 국민들로 하여금 정치 혐오감을 자극할 계기가 된다는 측면에서 좀 더 신중한 처신이 요구된다 할 것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정치가 진정성을 가지고 운영됐다면 대한민국 정치 풍경은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혹시 유권자 선택을 받고자 하는 이들의 봉사 마인드와 실행 평가가 선거에 일정정도 반영되도록 (학교현장의 봉사점수처럼) 한다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적어도 정치가 국민에게 ‘찬밥’ 대우받는 일은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봉사는 타인의 마음을 울리는 감동이 전제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대가를 바라거나 보여주기 위한 봉사는 진정성 측면에서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물론 신이 아닌 이상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봉사(헌신, 희생)를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봉사에 거래나 이해타산이 개입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보여주기 위한 봉사라도 없는 것 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없지 않지만 얄팍한 계산을 감추지 못한 봉사는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더 나아가 비애를 주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故이태석 신부의 이타적 삶은 귀감이 될 만하다.
그는 보장된 삶을 뒤로 한 채 자청해 찾아간 불모지에서 사랑을 꽃 피우는 기적을 일으켰다. 생면부지의 이국인들에게 기꺼이 자신의 전부를 바쳤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그들을 사랑했다. 또 아낌없는 사랑을 받기도 했다. 남을 위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스스로의 실천을 통해 알려주다가 하늘의 별이 됐다. 그는 비록 떠나갔지만 오로지 아프리카를 사랑하는 뜨거운 진심이 만든 그의 삶은 오래도록 많을 이들을 변화시키고 또 기억될 것이다.
요즘 세태 풍자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개그 콘서트를 즐겨 보고 있는데 촌철살인의 감동으로 놀라게 하는 내용이 많다. 특히 사마귀 유치원 코너의 ‘애정남’은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다.
애정남은 아니지만 내 나름대로 봉사의 질적 차이를 정리해 본다면 ‘시혜라도 베풀 듯 자신의 잉여지분을 (시간, 재물, 노동력 기타 등등) 나누는 것이 하위 개념의 봉사라면 정말로 소중하고 꼭 필요한 것 중에서 콩 한쪽 나누는 의리가 참다운 봉사’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까? 성경에서 부자의 두둑한 기부보다 과부의 동전 두 닢을 더 크게 평가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남을 위해 내 것을 나눠주는 봉사자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수혜를 받는 순환구조가 상식선이 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봉사도 해 본 사람이 더 많은 노하우를 갖기 마련이라는 관점에서 사회적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봉사의 생활화는 아무리 권장해도 부족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나눔의 정도가 한 나라의 사회적 가치나 구성원의 질적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을 기억하자. 선진국일수록 약자에 대한 나눔과 배려가 섬세하다는 사실 또한 명심할 일이다.
우리 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자신을 하층민이라고 생각하고 2년 전에 비해 자신을 상류층이나 중산층으로 평가하는 비율도 줄었다. 일생동안 노력하면 지위가 상승할 것이라는 기대감 역시 많이 줄었다는 소식이다. 정치권 잘못 때문이라는 지레 짐작으로 무거워진 마음을 60년 만에 맞게 될 흑룡을 생각하며 다잡아본다. 흑룡을 희망삼아 나누면서 커지는 신년 설계가 위축된 국민 마음에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말이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격려, 희생과 봉사를 통해 2011년 마무리도 잘 해야겠지.
우리 대한민국이, 우리 국민 저마다 욱일승천의 기회를 거머쥘 수 있는 내년이 되기를.
(2011.12.15.)
....홍문종 생각
12월이 깊어가고 있다.
어깨를 움츠리게 하는 추위가 마지막 장으로 남은 달력의 황량함을 보태는 겨울이다.
이웃의 남루함이 유난히 아프게 다가오는 계절이기도 하다.
거리 곳곳에서 자선냄비를 채우는 손길들이 분주하다. 나눔과 배려로 불우한 이웃을 품고자 하는 반갑고 귀한 발걸음도 줄을 잇고 있다.
나누면 커지는 인생의 비밀을 실천하는 그곳에서 희망의 불꽃을 본다.
이웃의 고통에 마음을 여는 이들이 있는 한 세상은 여전히 살만하다는 생각이다.
내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출사표가 줄을 잇는 요즈음 국가와 민족을 위한 봉사와 헌신의 다짐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선거현장에서 남발되는 봉사 약속은 대부분 유권자 구애를 위한 미끼 용도에 그쳤다. 말로만 하는 봉사가 제일 나쁘다는데 바로 그런 행태를 보인 셈이다.
그렇지 않아도 칭찬거리가 변변치 않은 정치판에서 정치 입문을 꿈꾸는 사람들조차 구태를 답습하고 있어 큰일이다. 말로만 하는 구태를 청산하지 못한다면 사회적 분열은 물론 국민들로 하여금 정치 혐오감을 자극할 계기가 된다는 측면에서 좀 더 신중한 처신이 요구된다 할 것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정치가 진정성을 가지고 운영됐다면 대한민국 정치 풍경은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혹시 유권자 선택을 받고자 하는 이들의 봉사 마인드와 실행 평가가 선거에 일정정도 반영되도록 (학교현장의 봉사점수처럼) 한다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적어도 정치가 국민에게 ‘찬밥’ 대우받는 일은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봉사는 타인의 마음을 울리는 감동이 전제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대가를 바라거나 보여주기 위한 봉사는 진정성 측면에서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물론 신이 아닌 이상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봉사(헌신, 희생)를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봉사에 거래나 이해타산이 개입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보여주기 위한 봉사라도 없는 것 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없지 않지만 얄팍한 계산을 감추지 못한 봉사는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더 나아가 비애를 주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故이태석 신부의 이타적 삶은 귀감이 될 만하다.
그는 보장된 삶을 뒤로 한 채 자청해 찾아간 불모지에서 사랑을 꽃 피우는 기적을 일으켰다. 생면부지의 이국인들에게 기꺼이 자신의 전부를 바쳤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그들을 사랑했다. 또 아낌없는 사랑을 받기도 했다. 남을 위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스스로의 실천을 통해 알려주다가 하늘의 별이 됐다. 그는 비록 떠나갔지만 오로지 아프리카를 사랑하는 뜨거운 진심이 만든 그의 삶은 오래도록 많을 이들을 변화시키고 또 기억될 것이다.
요즘 세태 풍자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개그 콘서트를 즐겨 보고 있는데 촌철살인의 감동으로 놀라게 하는 내용이 많다. 특히 사마귀 유치원 코너의 ‘애정남’은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다.
애정남은 아니지만 내 나름대로 봉사의 질적 차이를 정리해 본다면 ‘시혜라도 베풀 듯 자신의 잉여지분을 (시간, 재물, 노동력 기타 등등) 나누는 것이 하위 개념의 봉사라면 정말로 소중하고 꼭 필요한 것 중에서 콩 한쪽 나누는 의리가 참다운 봉사’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까? 성경에서 부자의 두둑한 기부보다 과부의 동전 두 닢을 더 크게 평가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남을 위해 내 것을 나눠주는 봉사자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수혜를 받는 순환구조가 상식선이 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봉사도 해 본 사람이 더 많은 노하우를 갖기 마련이라는 관점에서 사회적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봉사의 생활화는 아무리 권장해도 부족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나눔의 정도가 한 나라의 사회적 가치나 구성원의 질적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을 기억하자. 선진국일수록 약자에 대한 나눔과 배려가 섬세하다는 사실 또한 명심할 일이다.
우리 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자신을 하층민이라고 생각하고 2년 전에 비해 자신을 상류층이나 중산층으로 평가하는 비율도 줄었다. 일생동안 노력하면 지위가 상승할 것이라는 기대감 역시 많이 줄었다는 소식이다. 정치권 잘못 때문이라는 지레 짐작으로 무거워진 마음을 60년 만에 맞게 될 흑룡을 생각하며 다잡아본다. 흑룡을 희망삼아 나누면서 커지는 신년 설계가 위축된 국민 마음에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말이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격려, 희생과 봉사를 통해 2011년 마무리도 잘 해야겠지.
우리 대한민국이, 우리 국민 저마다 욱일승천의 기회를 거머쥘 수 있는 내년이 되기를.
(2011.12.15.)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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