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독립 문화원
하와이에 와 있다.
하와이 독립문화원의 이사장 취임을 위한 일정 때문인데 대를 이어 독립 운동하는 심정으로 바쁜 일정을 쪼갰다.
이 곳 독립문화원과 아버지 사이의 각별한 인연을 생각하면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도 그럴 것이 10년 전 일본인들이 독립유적지였던 이곳을 콘도로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사재를 털어 독립문화원을 조성하겠다는 아버지의 적극적인 의지가 아니었다면 우리의 하와이 항일투쟁사 일부가 일본인 소유의 콘도에 짓눌려 역사의 뒤안길에 묻히게 됐을지 모를 일이다.
독립문화원은 개인적으로도 각별한 정서로 다가서는 공간이다.
독립유적지 보존을 필생의 사업으로 삼아 매진했던 아버지의 열정과, 먼 이역 땅에서 고국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애국지사의 얼이 깃든 곳이라는 점에서 더 그런 것 같다.
하와이는 우리나라 최초로 공식적인 미국이민이 시작된 곳이다. 1902년 제물포항에서 증기선을 탄 121명을 필두로 1905년 이민이 금지될 때까지 모두 7843명이 이곳에 이주해 정착했다.
그렇게 이주한 애국지사들은 사탕수수밭에서 일한 돈으로 임시정부 활동을 도왔다. 지고지순한 마음으로 풍전등화 같던 조국의 안위를 걱정하며 본토수복을 위한 결사항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현재의 독립문화원 터는 그분들이 결성해서 활동했던 ‘국민회’ 건물이 있던 장소로 순결한 항일 투쟁의 역사가 고스란히 간직된 곳이다.
그런 만큼 독립문화원이 상징하는 역사적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이다.
안타까운 건 국가차원의 지속적인 관심이 진척을 보이지 못하는 상황이다.
개인의 관심이나 뒷바라지만으로는 채워지지 못하고 급기야 외면과 방치가 거듭되면서 독립유적지들이 유실되고 있다.
우리의 현재가 조국이 기약없는 불운에 흔들리고 있을 때 불꽃처럼 자신을 태우며 조국의 독립을 염원한 이들이 처절한 희생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다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주소는 어떤가?
조국이 불행할 때 홀연히 나서 모든 것을 던졌던 조상의 숭고한 흔적들 하나 지켜내지 못하는, 참으로 부끄러운 무능함을 방기하고 있다.
세계 경제의 선진 그룹을 자처하면서도 아픈 역사를 대하는 무심함은 지나치게 후진적이다. 몇 곳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해외 독립운동 사적지가 유기돼 있는 현실이 단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해외 독립 유적지의 역사적 배경이나 흔적이 지워질수록 대한민국의 국격도 비례해서 떨어지고 있다는 위기감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이런 현실이 머지않아 대한민국의 감추고 싶은 치부가 될 것이라는 데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선진국일수록 조국의 사소한 인연까지도 국가의 자존심 반열에 올려놓고 최선을 다하는 게 상례였음을 기억하자. 더불어 국가가 세심하게 예우해야 할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건 해외 교민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각성도 촉구하는 바이다.
우리 정부나 국내 기업가 적극적이고 항구적인 지원책으로 해외에 흩어진 유적보호에 적극적인 관심으로 나서길 기대한다.
때 마침 이 곳 하와이는 11월 대통령 방문을 앞두고 교민사회 전체가 들떠 있는 분위기다.
대통령과 함께 하는 자리에 초대될 100명 인사의 향방이 초미의 관심사로 부각된 가운데 미묘한 신경전도 있다는 후문이다. 역대 대통령 방문 때마다 되풀이되는 후유증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초대 명단에 교민사회에서 신망이 두터운 인사 대신 지탄받는 인사들이 섞이는 경우가 종종 있어 대통령 방문이 교민사회 단합이 아닌 분란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초대자 명부를 어떤 기준으로 작성할지 모르지만 이번 만큼은 최대한 투명한 방식으로 처리하고 세심한 부분까지 배려한 결과물이 되었으면 한다.
특히 반드시 참석해야 할 인사에 대한 세심함이 있어야겠다.
뻔한 사람들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해도 최소한 정부가 특별히 배려하지 않으면 초대받기 어려운 독립유공자나 항일투사의 자손을 위한, 필요하다면 따로 자리를 마련해서라도 모시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2011. 10.13)
....홍문종 생각
2011년 10월 13일 목요일
2011년 10월 12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본질은 백년지계다
본질은 백년지계다
해마다 이맘때면 대학가를 강타하는 연례행사가 있다.
각 기관의 이런 저런 평가 결과를 바탕으로 한 대학 랭킹 발표로 벌어지는 대학 간 경쟁이 그것이다.
그러나 비합리적인 평가 기준 때문에 속앓이하는 대학들이 늘고 있어 문제다.
전혀 객관적이지 않고 일관적이지 않는 순위결과도 그렇지만 평가 기관에 따라 서열 순위가 달라지는 일도 속출하고 있다. 발표기관이나 평가기준에 따라 들쭉날쭉한 결과지만 당사자인 대학 입장에서는 민감한 이슈일 수 밖에 없다. 랭킹 경쟁이 대학의 모든 능력을 대변하는 것처럼 대학들이 갈수록 순위 경쟁에 매달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 대학가만의 풍경이 아니다. 경쟁력 있는 대학들이 몰려있는 미국에서 조차 대학랭킹에 초연해지지 못하는 모습이다. 평가와 그에 따른 순위가 발표될 때마다 예외 없이 각 대학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나서는데 국내외가 다르지 않다.
문제는 평가의 공정성이다.
현재로서는 교수 1인당 발표 논문 수, 영어 강의 비율 및 외국인 학생 수, 강의평가 공개율, 건강보험 데이터베이스와 연계한 졸업생 취업률 등의 지표를 기준으로 대부분의 평가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각 대학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평가과정이 아무런 개선의 노력없이 다년간 지속되고 있는데 이 같은 현실이 방기되고 있다. 대학 간 경쟁력을 비교하는 평가가 출발점부터 불공정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예술 분야 비중이 큰 대학에게는 이런 방식의 평가 지표는 독약일 수 밖에 없다. 예술계통 학문의 특성 상 대부분이 대학 졸업 이후 곧바로 취업하기 어려운 여건인데도 취업률 평가에서 이를 배려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최근 발표된 한 언론사의 국내 대학 평가 결과에서도, 심지어 교과부의 부실대학 심사과정에서도 똑같이 노출된 문제다.
그런데도 대학랭킹을 수단으로 한 관련 산업은 날로 번창하는 분위기다.
심지어 대학이 돈벌이에 놀아난다는 비아냥까지 나오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순위에 따라 대접도 천양지차로 달라지니 어쩔 수 없다.
무심코 던진 돌멩이가 개구리의 생사를 가르듯 대학 랭킹에 따라 존립이 좌우되는 대학으로선 평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몸짓을 펼치는 처지일 수 밖에 없다. 명문대학은 명문대학대로, 중하위권 그룹 대학은 또 그들대로 순위 경쟁에 목을 맬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실제로 정교하지 않은 평가결과가 해당 대학의 심각한 피해로 이어지는 일이 부지기수인 현실이다. 관점은 다르지만 교과부 평가에서 하위 랭킹에 속하게 된 몇몇 대학의 운명도 같은 맥락이다. 실질적인 평가와 상관없이 순위 경쟁에 밀렸다는 이유만으로 폐교될 위기에 처해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각 대학들이 질적 향상을 위한 노력보다 평가기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르겠다.
대학 랭킹 경쟁은 경쟁력 제고라는 긍정적 측면보다는 빈익빈 부익부 초래로 대학의 균형발전을 저해하고 하위 랭킹에 속한 대학들의 의욕 상실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부작용이 많다는 생각이다.
랭킹 경쟁보다는 각 대학이 지향하는 목표나 이상을 더 잘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접근 방식이 교육의 백년지계를 위해 바람직하고 현실적인 해법이다.
그런 점에서 올 초 국제교육협의회에서 발표한 경쟁교육 폐해에 대한 연구 결과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35개 조사 대상국 가운데 우리나라 학생들은 ‘사회적 상호작용 역량지표’에서 0.31점, 관계지향성과 사회적 협력 부문 0점으로 각각 최하위였다 개인의 행복지수 역시 OECD 국가 중 꼴찌였다. 충격적이지만 적나라한 우리 교육의 현실이었다.
의미없는 경쟁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가를 보여줬고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공멸뿐이라는 위기를 입증할 만한 자료라는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이야말로 대학 스스로 유치하고 비생산적인 랭킹 싸움에 더 이상 놀아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대학의 내실화를 위한 일단의 사회적 노력들이 뒷받침 돼야겠다. 대학의 특성화나 생존전략에 방점을 둔 평가 작업으로의 전환도 고려할 만한 방안이다.
물론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나 역시 대학을 책임지고 있는 입장에서 대학 순위에 민감해질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그런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우리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력 등을 생각하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내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럴 때마다 정말 쓸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에 자괴감에 빠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교육은 역사와 민족의 미래를 위한 가능성에 대한 투자다.
'시대를 뛰어넘는 제품은 시장조사가 필요 없다'고 했던 스티브 잡스처럼 시대를 뛰어넘는 인재 양성을 교육의 소명으로 삼도록 하자. 그렇게 최선을 다한 이후의 역량을 바탕으로 한 대학 순위 평가라면 좀 더 공정한 평가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100년, 200면 이후를 내다봐야 하는 교육의 본질에 가장 적절한 평가방식이고 미래지향적인 가늠자를 토대로 결정돼야 할 대학 순위가 천박한 상업주의에 끌려 다니는 볼썽사나운 작태를 멈추게 하는 바로미터가 되지 않을까 싶다. 마찬가지로 순위 때문에 총장이나 교수들이 구체적인 불법까지는 아니더라도 통계 수치를 조작하는 등의 편법에 가담하는 안타까운 현실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스스로가 나서야 할 때이기도 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교육을 백년지계로 설정한 선인의 속 깊은 의중을 배제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되겠다.
최근 한 언론사의 국내대학 평가에서 재벌기업이 관계한 두 대학이 각각 상위권에 진입하는 공교로운(?) 사건이 마음에 걸린다. 두 대학의 기업마인드를 극찬한 해당 언론 기사의 헤드라인도 공교롭기는 마찬가지다. 재벌기업의 막대한 영향력이 대학의 질적 평가에 개입하는 신호탄은 아닌지 모르겠다. 더 나아가 재벌 기업이 교육기관 판까지 좌우하는 막장까지 보게 될까봐 솔직히 걱정되기도 한다.
중소기업 먹거리까지 손대는 탐욕이고 보면 불가능한 현실만은 아닐 수도 있다.
(2011. 10. 11)
....홍문종 생각
해마다 이맘때면 대학가를 강타하는 연례행사가 있다.
각 기관의 이런 저런 평가 결과를 바탕으로 한 대학 랭킹 발표로 벌어지는 대학 간 경쟁이 그것이다.
그러나 비합리적인 평가 기준 때문에 속앓이하는 대학들이 늘고 있어 문제다.
전혀 객관적이지 않고 일관적이지 않는 순위결과도 그렇지만 평가 기관에 따라 서열 순위가 달라지는 일도 속출하고 있다. 발표기관이나 평가기준에 따라 들쭉날쭉한 결과지만 당사자인 대학 입장에서는 민감한 이슈일 수 밖에 없다. 랭킹 경쟁이 대학의 모든 능력을 대변하는 것처럼 대학들이 갈수록 순위 경쟁에 매달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 대학가만의 풍경이 아니다. 경쟁력 있는 대학들이 몰려있는 미국에서 조차 대학랭킹에 초연해지지 못하는 모습이다. 평가와 그에 따른 순위가 발표될 때마다 예외 없이 각 대학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나서는데 국내외가 다르지 않다.
문제는 평가의 공정성이다.
현재로서는 교수 1인당 발표 논문 수, 영어 강의 비율 및 외국인 학생 수, 강의평가 공개율, 건강보험 데이터베이스와 연계한 졸업생 취업률 등의 지표를 기준으로 대부분의 평가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각 대학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평가과정이 아무런 개선의 노력없이 다년간 지속되고 있는데 이 같은 현실이 방기되고 있다. 대학 간 경쟁력을 비교하는 평가가 출발점부터 불공정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예술 분야 비중이 큰 대학에게는 이런 방식의 평가 지표는 독약일 수 밖에 없다. 예술계통 학문의 특성 상 대부분이 대학 졸업 이후 곧바로 취업하기 어려운 여건인데도 취업률 평가에서 이를 배려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최근 발표된 한 언론사의 국내 대학 평가 결과에서도, 심지어 교과부의 부실대학 심사과정에서도 똑같이 노출된 문제다.
그런데도 대학랭킹을 수단으로 한 관련 산업은 날로 번창하는 분위기다.
심지어 대학이 돈벌이에 놀아난다는 비아냥까지 나오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순위에 따라 대접도 천양지차로 달라지니 어쩔 수 없다.
무심코 던진 돌멩이가 개구리의 생사를 가르듯 대학 랭킹에 따라 존립이 좌우되는 대학으로선 평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몸짓을 펼치는 처지일 수 밖에 없다. 명문대학은 명문대학대로, 중하위권 그룹 대학은 또 그들대로 순위 경쟁에 목을 맬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실제로 정교하지 않은 평가결과가 해당 대학의 심각한 피해로 이어지는 일이 부지기수인 현실이다. 관점은 다르지만 교과부 평가에서 하위 랭킹에 속하게 된 몇몇 대학의 운명도 같은 맥락이다. 실질적인 평가와 상관없이 순위 경쟁에 밀렸다는 이유만으로 폐교될 위기에 처해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각 대학들이 질적 향상을 위한 노력보다 평가기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르겠다.
대학 랭킹 경쟁은 경쟁력 제고라는 긍정적 측면보다는 빈익빈 부익부 초래로 대학의 균형발전을 저해하고 하위 랭킹에 속한 대학들의 의욕 상실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부작용이 많다는 생각이다.
랭킹 경쟁보다는 각 대학이 지향하는 목표나 이상을 더 잘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접근 방식이 교육의 백년지계를 위해 바람직하고 현실적인 해법이다.
그런 점에서 올 초 국제교육협의회에서 발표한 경쟁교육 폐해에 대한 연구 결과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35개 조사 대상국 가운데 우리나라 학생들은 ‘사회적 상호작용 역량지표’에서 0.31점, 관계지향성과 사회적 협력 부문 0점으로 각각 최하위였다 개인의 행복지수 역시 OECD 국가 중 꼴찌였다. 충격적이지만 적나라한 우리 교육의 현실이었다.
의미없는 경쟁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가를 보여줬고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공멸뿐이라는 위기를 입증할 만한 자료라는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이야말로 대학 스스로 유치하고 비생산적인 랭킹 싸움에 더 이상 놀아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대학의 내실화를 위한 일단의 사회적 노력들이 뒷받침 돼야겠다. 대학의 특성화나 생존전략에 방점을 둔 평가 작업으로의 전환도 고려할 만한 방안이다.
물론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나 역시 대학을 책임지고 있는 입장에서 대학 순위에 민감해질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그런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우리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력 등을 생각하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내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럴 때마다 정말 쓸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에 자괴감에 빠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교육은 역사와 민족의 미래를 위한 가능성에 대한 투자다.
'시대를 뛰어넘는 제품은 시장조사가 필요 없다'고 했던 스티브 잡스처럼 시대를 뛰어넘는 인재 양성을 교육의 소명으로 삼도록 하자. 그렇게 최선을 다한 이후의 역량을 바탕으로 한 대학 순위 평가라면 좀 더 공정한 평가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100년, 200면 이후를 내다봐야 하는 교육의 본질에 가장 적절한 평가방식이고 미래지향적인 가늠자를 토대로 결정돼야 할 대학 순위가 천박한 상업주의에 끌려 다니는 볼썽사나운 작태를 멈추게 하는 바로미터가 되지 않을까 싶다. 마찬가지로 순위 때문에 총장이나 교수들이 구체적인 불법까지는 아니더라도 통계 수치를 조작하는 등의 편법에 가담하는 안타까운 현실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스스로가 나서야 할 때이기도 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교육을 백년지계로 설정한 선인의 속 깊은 의중을 배제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되겠다.
최근 한 언론사의 국내대학 평가에서 재벌기업이 관계한 두 대학이 각각 상위권에 진입하는 공교로운(?) 사건이 마음에 걸린다. 두 대학의 기업마인드를 극찬한 해당 언론 기사의 헤드라인도 공교롭기는 마찬가지다. 재벌기업의 막대한 영향력이 대학의 질적 평가에 개입하는 신호탄은 아닌지 모르겠다. 더 나아가 재벌 기업이 교육기관 판까지 좌우하는 막장까지 보게 될까봐 솔직히 걱정되기도 한다.
중소기업 먹거리까지 손대는 탐욕이고 보면 불가능한 현실만은 아닐 수도 있다.
(2011. 10. 11)
....홍문종 생각
2011년 10월 8일 토요일
홍문종 생각 - 스티브 잡스 2
스티브 잡스 2
스티브 잡스의 위대한 삶은 미국인으로 살지 않았다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살아있을 때보다 사망 이후 더 주가를 올리고 있는 스티브 잡스의 극적인 삶을 지켜보면서 떠올려 본 생각이다.
스티브 잡스를 우리 시각으로 보자면 (우리 국민이 그토록 좋아하는)스펙 없는 혼혈 사생아일 뿐이다.
그런 잡스를 차별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미국의 저력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닌 게 아니라 수많은 부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포용과 배려의 미덕이 넘치는 미국사회의 저력이 스티브 잡스의 오늘을 만든 일등공신이라는 현실만큼은 부인하지 못하겠다. 출신지나 과거 행적에 연연해하지 않는 실용주의적 안목이 아니었다면 세상을 혁신하고자 하는 그의 꿈은 세상 밖으로 명함도 못내밀고 스러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분명한 것은 현재의 스티브 잡스 효과가 미국 경제에 미치는 파급은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이다.
미국으로서는 엄청난 호재를 만난 셈이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탄생도 따지고 보면 미국사회의 열린 분위기 덕을 톡톡히 본 사례다. 실제로 잡스와 오바마는 각각 시리아와 케냐 출신이었고 그나마 잡스의 경우는 사생아인데다 지방대학 중퇴가 학력의 전부였다. 마약 전력이 있는 오바마 역시 자유로울 수 있는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둘은 미국 사회의 대표적 아이콘이 되었다.
이들을 영웅으로 만든 건 흔들림 없는 선택으로 미국의 가치를 지키고자 했던 국민들의 혜안이었다.
거기에 인력 자원을 국가 경쟁력 관점에서 풀어나간 미국의 선견지명도 공신계열에서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실리콘벨리를 통해서도 인재를 구하는 미국의 통 큰 처세를 목도할 수 있다.
실리콘벨리를 움직이는 두뇌집단 50%가 한국, 일본, 중국 등 이국의 인재들이라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내 것만을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세계 각국의 문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멀팅포트 문화는 국가 경쟁력을 키우는 미국의 세심한 노하우가 담겨 있다. 외부의 문화들이 모방과 순응하는 과정을 거쳐 자연스럽게 미국화 되는 결과조차 미국이 가진 경쟁력의 일부로 보인다. 이는 다른 국가나 종족에 대해 꾸준한 배려를 통해 자국의 영향력을 키워가는 미국만의 독특한 문화 방식으로 해석된다. 세계화 시대에 자기 국민을 정확하게 알고 보듬을 줄 아는 융통성이 핵심인데 미국의 위대함을 지탱해주고 미국이 미국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가치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미국의 위대함은 모방만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배려하는 유연한 사고가 더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특별한 한가지.
스티브 잡스의 비공개 장례식을 통해 미국사회의 또 다른 매력을 엿보고 있다.
전 세계의 이목이 쏠려있는 상태에서 열화와 같이 쏟아지는 추모열기가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그의 장례식은 고인의 바람대로 측근들만 참여한 채 비공개로 진행됐다.
이에 대해 섭섭함이 토로됐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그저 개인의 자유의지를 최대한 존중하고 보호하는 분위기의 연속이다. 성숙한 사회적 분위기에 압도되는 느낌이다.
선입견이 배제된 체 무한대로 주어진 자유를 아무 얽매임 없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허락받은 그의 삶이 질투가 느껴질 만큼 부럽다. 경이롭기까지 하다.
자유인의 지존으로 불릴 만하다.
그렇게 참 자유를 구가한 삶의 질로만 평가한다면 잡스로서는 아무런 여한도 없을 것 같다.
그런 미국에 비해 우리의 현실은 아직 멀었다.
여전히 외국인이라고, 여자라고, 무산계급이라고 차별받는 부당한 현실이 근절되지 않고 있다. 기존 권력을 암묵적인 구태로 유지하려 드는 편협한 시각에 사로잡힌 사람들 때문이다. 화려한 겉치레에 갇혀 구체적 실리를 외면하는 어리석음이 수많은 가능성을 억압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국수주의적 사고에 대한 현실 인식이 시급하다.
국가 간 인종 간 경계 자체가 무의미해져가고 있는 시대적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맹목적 혈통주의에 빠져 우리만의 역사와 전통이 최고라고 내세우는 시대적 착오가 머지않아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족쇄가 된다는 건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오래 전 우리도 미국 땅을 향해 꿈을 품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 따위는 까맣게 잊고 대한민국 사회에 편입되기 원하는 수많은 약소국 이주민들을 냉대하는 이중성을 자행하고 있다. 약소국에 대한 근거없는 우월감을 기형적 행태로 풀어놓는 일이 얼마나 큰 부끄러움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주민을 배제한 채 우리끼리 만의 소통으로는 대한민국의 21세기도 존속할 수 없는 냉엄한 현실을 직시할 일이다. 이주민과의 공조를 공존의 화두로 삼아야 하는 이유다.
법 제정을 통해서라도 우리에게 문호개방을 원하는 이주민들을 위한 방도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해외 이주민의 경우 대학입학에서도 쿼터제 등 그들만의 합리적인 경쟁이 가능할 수 있는 우대정책으로 정착을 도울 수 있도록 서두를 일이다. 우리끼리만 잘난 나머지 우물안 개구리가 된다면 국가 경쟁력을 훼손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편견을 내려놓고 배려와 공감을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자.
우리라고 제2, 제3의 스티브 잡스를 만나 지 말란 법 없다.
사회적 관점의 틀을 바꾸면 예상 외로 수월할 수 있다.
(2011. 10. 9)
....홍문종 생각
2011년 10월 7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굿 바이~ 잡스
굿 바이~ 잡스
이번에는 스티브 잡스의 부음이 지구 건너편으로부터 날아들었다.
예고된 불행이었지만 무거움이 가슴을 파고드는 소식이었다.
남다른 삶의 자취를 남기고 홀연히 떠나 버린 천재의 부재를 알리는 조종소리에 온 종일 회색빛에 갇혀 헤맨 사람은 아마도 나 하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외롭지 않은 그의 마지막이 한 줌 위안이 됐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전 세계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어 세상과의 인연을 거두는 스티브 잡스를 배웅했다. 많은 이들이 진심을 다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인류역사의 새 기원을 마련한 고인에 대한 예우를 잊지 않았다. 그렇게 스스로의 삶에 최선을 다해 세상을 잘 살다간 영웅의 자취를 기려 주었다.
언젠가 잡스가 자신을 있게 한 인생의 결정적 축복, 3가지를 얘기한 적이 있는데 일반적인 판단으로는 축복은커녕 인생 가도에 걸림돌이 되기에 충분한 최악의 설정들이었다.
실제로 돈이 없어 6개월만에 대학을 포기했고 자기가 만든 애플에서 축출됐다. 그리고 예고된 죽음 앞에서 언제 죽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두려움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잡스는 그 어느 것도 자신의 인생에 해악을 끼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는 대학의 중도 포기는 흥미에 따라 다양한 공부를 접할 수 있는 기회로, 애플에서 쫓겨나 백수가 됐을 때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재정비하는 시간으로 만들었다. 죽음이 예고된 인간의 한계의 경우, 하루하루를 마지막인 것처럼 충실하게 지내는 방법으로 반전을 꾀했다. 인생의 걸림돌이 될 가능성들을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순기능적 상황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결국 그런 기질들이 잡스가 IT 업계의 독보적 존재로 자리매김하는데 일조한 결정타로 작용한 셈이다.
곳곳에 명료하게 박혀있는 巨人의 자취가 연일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들여다보니 56년이라는 길지 않은 삶을 통해 고인이 세상에 남긴 업적들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새삼스럽다.
무엇보다 동갑내기로 동시대를 살아온 깊은 인연이 있는 내게 그의 생애는 남다른 감회일 수 밖에 없다. (그것도 불과 40여일 정도 뒤늦게 태어난 미세한 시차다)
그래서인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스티브 잡스 관련 자료를 더듬으며 나의 삶과 비교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사생아로서 불우한 성장과정을 거친 잡스와 내가 환경적 측면에서 일치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여건은 다르지만 나 역시 잡스 못지않은 굴곡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선은 내 화려한(?) 학업 이력을 꼽을 수 있겠다.
잡스처럼 학교를 도중에 그만 둔 건 아니지만 잡스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 전적이다.
다양한 분야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았던 중고교 시절 천당과 지옥을 오가던 성적을 비롯해서 초등학교 4번, 중학교 2번의 전학생활로 쌓은 내공의 역사,(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고군분투를 생각해보라), 거기다 미국 유학을 통한 신학, 행정학, 교육학, 법학, 정치학 등 엄청나게 다양한 학문의 종류는 둘째치고 내가 다닌 대학 역시 일일이 열거하려면 필기구가 필요할 정도다. 그 과정에서 학생회장이나 반장등 수없이 많이 당선의 영광도 있었지만, 낙선의 다양한 이력 역시 만만치않다.
고려대를 비롯해서 미국의 리버티, 스탠포드, 하버드 그리고 동경대와 북경대를 돌면서 4개의 석사 학위와 3개의 박사학위를 남겼으니 하는 말이다.
이러한 결과물들은 끊임없는 지적 호기심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갈망이 몸살을 앓던 청소년기의 내 방황의 역사이기도하다.
2번의 국회의원 뱃지를 달았던 정치 과정도 순조롭지 않았던 건 마찬가지다.
복잡한 사연이 펼쳐지는 와중에 탈당도 했고 공천탈락도 겪었다. 한참 잘나가던 한나라당 경기도당 위원장 시절에는 잠깐의 방심으로 내부세력의 표적이 되어 좌절을 겪기도 했다. 말도 안되는 선거법 위반에 발목을 잡혀 오랜 시간 동안 분루를 삼키는 와신상담을 경험하기도 했다.
결국 그런 시간들이 또 다른 측면에서 정치적 내공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아픈 상흔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지금 이 순간에는 전 세계에 울림을 주고 있는 그에 대한 부러움이 내 뇌리를 지배하고 있다.
잡스처럼 전 세계까지는 아니어도 나의 조국, 대한민국 땅에서만큼은 반향을 줄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소망이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계속 갈망하라 여전히 우직하게(Stay Hungry, Stay Foolish)'
그의 힘 있는 목소리가 하루를 정리하는 내 귀에 또렷하게 각인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당신의 소망은 반드시 이룰 수 있습니다”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
내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는 잡스의 격려가 에너지를 생동시키고 있다.
굿 바이~ 잡스.
....홍문종 생각 (2011. 10. 7)
이번에는 스티브 잡스의 부음이 지구 건너편으로부터 날아들었다.
예고된 불행이었지만 무거움이 가슴을 파고드는 소식이었다.
남다른 삶의 자취를 남기고 홀연히 떠나 버린 천재의 부재를 알리는 조종소리에 온 종일 회색빛에 갇혀 헤맨 사람은 아마도 나 하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외롭지 않은 그의 마지막이 한 줌 위안이 됐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전 세계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어 세상과의 인연을 거두는 스티브 잡스를 배웅했다. 많은 이들이 진심을 다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인류역사의 새 기원을 마련한 고인에 대한 예우를 잊지 않았다. 그렇게 스스로의 삶에 최선을 다해 세상을 잘 살다간 영웅의 자취를 기려 주었다.
언젠가 잡스가 자신을 있게 한 인생의 결정적 축복, 3가지를 얘기한 적이 있는데 일반적인 판단으로는 축복은커녕 인생 가도에 걸림돌이 되기에 충분한 최악의 설정들이었다.
실제로 돈이 없어 6개월만에 대학을 포기했고 자기가 만든 애플에서 축출됐다. 그리고 예고된 죽음 앞에서 언제 죽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두려움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잡스는 그 어느 것도 자신의 인생에 해악을 끼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는 대학의 중도 포기는 흥미에 따라 다양한 공부를 접할 수 있는 기회로, 애플에서 쫓겨나 백수가 됐을 때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재정비하는 시간으로 만들었다. 죽음이 예고된 인간의 한계의 경우, 하루하루를 마지막인 것처럼 충실하게 지내는 방법으로 반전을 꾀했다. 인생의 걸림돌이 될 가능성들을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순기능적 상황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결국 그런 기질들이 잡스가 IT 업계의 독보적 존재로 자리매김하는데 일조한 결정타로 작용한 셈이다.
곳곳에 명료하게 박혀있는 巨人의 자취가 연일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들여다보니 56년이라는 길지 않은 삶을 통해 고인이 세상에 남긴 업적들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새삼스럽다.
무엇보다 동갑내기로 동시대를 살아온 깊은 인연이 있는 내게 그의 생애는 남다른 감회일 수 밖에 없다. (그것도 불과 40여일 정도 뒤늦게 태어난 미세한 시차다)
그래서인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스티브 잡스 관련 자료를 더듬으며 나의 삶과 비교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사생아로서 불우한 성장과정을 거친 잡스와 내가 환경적 측면에서 일치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여건은 다르지만 나 역시 잡스 못지않은 굴곡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선은 내 화려한(?) 학업 이력을 꼽을 수 있겠다.
잡스처럼 학교를 도중에 그만 둔 건 아니지만 잡스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 전적이다.
다양한 분야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았던 중고교 시절 천당과 지옥을 오가던 성적을 비롯해서 초등학교 4번, 중학교 2번의 전학생활로 쌓은 내공의 역사,(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고군분투를 생각해보라), 거기다 미국 유학을 통한 신학, 행정학, 교육학, 법학, 정치학 등 엄청나게 다양한 학문의 종류는 둘째치고 내가 다닌 대학 역시 일일이 열거하려면 필기구가 필요할 정도다. 그 과정에서 학생회장이나 반장등 수없이 많이 당선의 영광도 있었지만, 낙선의 다양한 이력 역시 만만치않다.
고려대를 비롯해서 미국의 리버티, 스탠포드, 하버드 그리고 동경대와 북경대를 돌면서 4개의 석사 학위와 3개의 박사학위를 남겼으니 하는 말이다.
이러한 결과물들은 끊임없는 지적 호기심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갈망이 몸살을 앓던 청소년기의 내 방황의 역사이기도하다.
2번의 국회의원 뱃지를 달았던 정치 과정도 순조롭지 않았던 건 마찬가지다.
복잡한 사연이 펼쳐지는 와중에 탈당도 했고 공천탈락도 겪었다. 한참 잘나가던 한나라당 경기도당 위원장 시절에는 잠깐의 방심으로 내부세력의 표적이 되어 좌절을 겪기도 했다. 말도 안되는 선거법 위반에 발목을 잡혀 오랜 시간 동안 분루를 삼키는 와신상담을 경험하기도 했다.
결국 그런 시간들이 또 다른 측면에서 정치적 내공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아픈 상흔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지금 이 순간에는 전 세계에 울림을 주고 있는 그에 대한 부러움이 내 뇌리를 지배하고 있다.
잡스처럼 전 세계까지는 아니어도 나의 조국, 대한민국 땅에서만큼은 반향을 줄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소망이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계속 갈망하라 여전히 우직하게(Stay Hungry, Stay Foolish)'
그의 힘 있는 목소리가 하루를 정리하는 내 귀에 또렷하게 각인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당신의 소망은 반드시 이룰 수 있습니다”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
내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는 잡스의 격려가 에너지를 생동시키고 있다.
굿 바이~ 잡스.
....홍문종 생각 (2011. 10. 7)
2011년 10월 5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점령된 월스트리트
점령된 월스트리트
10여 년 전만 해도 ‘아메리칸 드림’은 유효했다.
17세기 청교도들이 공동의 꿈으로 신세계를 연 이후 능력있고 부지런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이 기회의 땅에 수많은 발길들이 이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하층민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지구상 가장 이상적인 자본주의 국가로 미국을 꼽는데 망설이지 않았고 꽤 오랜 시간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경찰국가로서의 미국의 역할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 미국 사회에서 지난 17일 ‘월스트리트 점령’ 구호로 시작된 시위가 3주째 미국의 가을을 달구고 있다는 소식은 놀랍다. 미국경제가 월가의 탐욕으로 나락에 빠져들고 티파티로 대변되는 보수파로 인해 끝없는 나락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며 들고 일어난 자발적 시민봉기가 세계의 금융 1번가를 강타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더 이상 1%의 탐욕과 부패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99%의 결연한 의지로 뭉친 모습이 심상치 않다. 부패한 자본 금융을 향해 던지는 이들의 돌팔매가 미국 전역은 물론 세계 각지로 그 열기를 이어갈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미국사회가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계층 간 간극을 메우기 위한 개인적인 노력이 기여하는 바 컸다는 생각이다.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성공을 사회로부터 받은 ‘운 좋은 선물’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하고 이를 공동체에 나누고자 하는 지혜로운 노력 때문에 미국이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천으로 부자들이 존경받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부터가 미국의 남다름을 설명할 수 있는 배경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미국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오늘 날 미국의 몰락은 이들이 미국의 사회 정의나 시스템이 준 혜택, 미국시민의 의무, 더불어 사는 사회에 대한 열망 등 아주 평범하면서도 중요한 미국사회의 가치들을 헌신짝처럼 내버린 결과라고 해도 무리가 아닌 현실이 되고 말았다. 급기야 미국의 정치 경제가 펜대를 굴려 천문학적인 돈을 모은 상위 1%의 금융 자본가들에 의해 가동된다는 의심에 적절한 해명을 내놓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월가의 파격적인 풍경도 이 같은 미국의 속사정을 대변하는 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저축은행의 총체적 비리에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언론에 보도된 내용만으로도 도대체 인간의 기본이 돼 있는 사람들인가 의구심이 들 정도로 무모하고 엉망인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기업 윤리나 사회 정의는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합동수사단을 발족하고 엄중 수사를 다짐하는 등 정부당국의 대응이 있기는 하지만 국민의 속은 숯검정이 된 지 오래인 현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젊은이들의 근로 의욕을 상실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좀 더 세심한 뒤처리가 있어야겠다.
결국 피해자는 서민이기 때문에 공적자금을 투여해서 이 사태를 수습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른 바 악덕 업주가 됐건 시이오가 됐건 마지막 한푼까지 발본색원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철저하고 근본적인 환부 조치가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가장 큰 장점을 인센티브를 통한 동기유발과 자유의지에 둔다면 단점으로는 소득분배의 불균등이나 인간 가치의 결여 등을 들 수 있다. 자본주의 장점에만 치중하다보면 부의 불평등현상이 우려된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기본 동인인 인센티브 시스템 억제를 통한 해법을 찾을 수도 없는 일이다. 사회 전체의 균형있는 발달을 저해하는 문제점 때문에 선택에 신중을 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공산주의 물결이 세계를 지배할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결국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거나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 문제 때문에 붕괴한 전적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역시 인간의 욕심을 통제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다. 자본가들의 무절제한 이기심이 시스템 자체를 마비시키는 시도를 막아내지 못한다면 결국 자본주의 종말을 부를 수도 있다. 자본주의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특히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를 부른 리먼 브라더스 사태는 자본주의의 추악한 음모가 세계 경제 질서를 교란시킨 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우리가 왜 자본주의 현실을 파악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미래에 대해 고민해야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이번 시위 사태의 심각성이 월가의 점령이라는 물리적 상황 보다는 자본기득권층을 타도 대상으로 삼는 일련의 사회적 현상에 있다는 점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결국 미국의 미래도 여기에 달려있는 셈인데 문제 해결이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다.
미국이 됐건 우리가 됐건 결국 문제 해결의 핵심은 기득권의 대오각성이다.
몰핀이나 마약 처방으로 마치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비책이 있는 것처럼 호도하는 기득권층의 무사안일하고 이기적인 관점이 늘 문제다. 사술로 자리를 꿰어 차고 시간을 끌면서 행복한 노후 보장이 가능한 절대적 가치인 ‘돈’만 챙기면 된다는 식의 이기적 유전자가 작동하고 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는 국가체제 마저 헌신짝처럼 던져버릴 수 있는 탐욕에 찌든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어디에서도 답을 찾지 못할 만큼 곪아있는 눈 앞의 현실이 그저 어지러울 뿐이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리겠다는 자기희생적 각오로 문제를 접근하지 않으면 답 구하기는 참으로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그저 자성을 통해 거듭나야겠다는 뼈를 깎는 절박함이 필요할 뿐이다.
대한민국의 현주소는 어디쯤일까?
우리 사회의 기득권 계층으로 혜택을 많이 받은 수혜자의 한사람으로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내가 지금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니 한없이 무거워지는 마음이다.
(2011.10.5)
...홍문종 생각
10여 년 전만 해도 ‘아메리칸 드림’은 유효했다.
17세기 청교도들이 공동의 꿈으로 신세계를 연 이후 능력있고 부지런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이 기회의 땅에 수많은 발길들이 이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하층민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지구상 가장 이상적인 자본주의 국가로 미국을 꼽는데 망설이지 않았고 꽤 오랜 시간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경찰국가로서의 미국의 역할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 미국 사회에서 지난 17일 ‘월스트리트 점령’ 구호로 시작된 시위가 3주째 미국의 가을을 달구고 있다는 소식은 놀랍다. 미국경제가 월가의 탐욕으로 나락에 빠져들고 티파티로 대변되는 보수파로 인해 끝없는 나락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며 들고 일어난 자발적 시민봉기가 세계의 금융 1번가를 강타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더 이상 1%의 탐욕과 부패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99%의 결연한 의지로 뭉친 모습이 심상치 않다. 부패한 자본 금융을 향해 던지는 이들의 돌팔매가 미국 전역은 물론 세계 각지로 그 열기를 이어갈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미국사회가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계층 간 간극을 메우기 위한 개인적인 노력이 기여하는 바 컸다는 생각이다.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성공을 사회로부터 받은 ‘운 좋은 선물’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하고 이를 공동체에 나누고자 하는 지혜로운 노력 때문에 미국이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천으로 부자들이 존경받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부터가 미국의 남다름을 설명할 수 있는 배경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미국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오늘 날 미국의 몰락은 이들이 미국의 사회 정의나 시스템이 준 혜택, 미국시민의 의무, 더불어 사는 사회에 대한 열망 등 아주 평범하면서도 중요한 미국사회의 가치들을 헌신짝처럼 내버린 결과라고 해도 무리가 아닌 현실이 되고 말았다. 급기야 미국의 정치 경제가 펜대를 굴려 천문학적인 돈을 모은 상위 1%의 금융 자본가들에 의해 가동된다는 의심에 적절한 해명을 내놓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월가의 파격적인 풍경도 이 같은 미국의 속사정을 대변하는 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저축은행의 총체적 비리에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언론에 보도된 내용만으로도 도대체 인간의 기본이 돼 있는 사람들인가 의구심이 들 정도로 무모하고 엉망인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기업 윤리나 사회 정의는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합동수사단을 발족하고 엄중 수사를 다짐하는 등 정부당국의 대응이 있기는 하지만 국민의 속은 숯검정이 된 지 오래인 현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젊은이들의 근로 의욕을 상실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좀 더 세심한 뒤처리가 있어야겠다.
결국 피해자는 서민이기 때문에 공적자금을 투여해서 이 사태를 수습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른 바 악덕 업주가 됐건 시이오가 됐건 마지막 한푼까지 발본색원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철저하고 근본적인 환부 조치가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가장 큰 장점을 인센티브를 통한 동기유발과 자유의지에 둔다면 단점으로는 소득분배의 불균등이나 인간 가치의 결여 등을 들 수 있다. 자본주의 장점에만 치중하다보면 부의 불평등현상이 우려된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기본 동인인 인센티브 시스템 억제를 통한 해법을 찾을 수도 없는 일이다. 사회 전체의 균형있는 발달을 저해하는 문제점 때문에 선택에 신중을 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공산주의 물결이 세계를 지배할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결국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거나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 문제 때문에 붕괴한 전적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역시 인간의 욕심을 통제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다. 자본가들의 무절제한 이기심이 시스템 자체를 마비시키는 시도를 막아내지 못한다면 결국 자본주의 종말을 부를 수도 있다. 자본주의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특히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를 부른 리먼 브라더스 사태는 자본주의의 추악한 음모가 세계 경제 질서를 교란시킨 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우리가 왜 자본주의 현실을 파악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미래에 대해 고민해야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이번 시위 사태의 심각성이 월가의 점령이라는 물리적 상황 보다는 자본기득권층을 타도 대상으로 삼는 일련의 사회적 현상에 있다는 점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결국 미국의 미래도 여기에 달려있는 셈인데 문제 해결이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다.
미국이 됐건 우리가 됐건 결국 문제 해결의 핵심은 기득권의 대오각성이다.
몰핀이나 마약 처방으로 마치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비책이 있는 것처럼 호도하는 기득권층의 무사안일하고 이기적인 관점이 늘 문제다. 사술로 자리를 꿰어 차고 시간을 끌면서 행복한 노후 보장이 가능한 절대적 가치인 ‘돈’만 챙기면 된다는 식의 이기적 유전자가 작동하고 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는 국가체제 마저 헌신짝처럼 던져버릴 수 있는 탐욕에 찌든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어디에서도 답을 찾지 못할 만큼 곪아있는 눈 앞의 현실이 그저 어지러울 뿐이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리겠다는 자기희생적 각오로 문제를 접근하지 않으면 답 구하기는 참으로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그저 자성을 통해 거듭나야겠다는 뼈를 깎는 절박함이 필요할 뿐이다.
대한민국의 현주소는 어디쯤일까?
우리 사회의 기득권 계층으로 혜택을 많이 받은 수혜자의 한사람으로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내가 지금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니 한없이 무거워지는 마음이다.
(2011.10.5)
...홍문종 생각
2011년 10월 4일 화요일
홍문종 생각 - 재승박덕(才勝薄德)
재승박덕(才勝薄德)
각별한 친구 동생이 타계했다는 소식이 청천벽력의 충격과 함께 다가왔다.
이제 막 오십을 넘긴 죽음이기에 안타까움이 컸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세상 일이 다 좋기만 한 것도, 다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라는 정도는 익히 알고 있었는데도 자꾸만 허둥거리게 만들었다.
어릴 적부터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뭐든지 잘하는 재사였고 명문대를 졸업한 이후에도 남보다 빠르게 재벌기업 사장자리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하는 모습으로 주위의 부러움을 샀던 그였다. 그런 그가 더 이상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죽음의 지대에 속해있는 현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세상일을 다 이해할 수 없는 것 아니겠냐고 친구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게도 위로가 되지 않는 말로 어떻게 친구를 위로할까 싶어 슬그머니 속울음 속으로 밀어 넣고 말았다.
더 없이 착잡한 하루를 그렇게 보냈다.
아마도 미처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경황없이 상가에 앉아있는 와중에도 가인박명(佳人薄命), 재승박덕(才勝薄德) 고사성어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삼국지에는 젊은 나이에 계륵이라는 고사를 남긴 채 조조에게 죽임을 당하는 양수의 이야기가 나온다. 지나치게 머리가 좋았던 그는 계산하다가 자신의 거취를 결정하는 기회를 놓치고 결국 그 일이 조조의 경계심을 자극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공자의 애제자였던 염구 역시 재승박덕 때문에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 케이스다. 염구는 공자가 여러 곳에서 ‘藝’에 밝고 재상이 될 만한 재목’이라고 평할 만큼 재능을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현실정치에 대한 그의 빠른 이해력은 오히려 그의 발목을 옥죄는 족쇄가 되고 만다. 얕은 꾀로 스승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현실 안주를 도모하다가 공자로부터 파문 당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재능과 인품을 겸비하기가 쉽지 않은 현실을 경계한 선인들의 의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무엇보다도 세상 유혹이나 실패에 놓이는 결정적인 순간에 스스로의 속도조절이 가능한 내공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인지 깨닫게 해 줬다.
상가에서 나와 착잡한 마음을 식히려고 올려다 본 밤하늘 별빛이 오늘따라 유난히 고왔다.
장례식장 건물 너머 4343주년 개천절을 기념하는 태극기가 밤 경계를 가르고 묘한 조화로 나부끼는 모습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우주의 한 점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미미한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빛의 산란이 신의 계시처럼 가슴에 스며드는 순간이었다.
문득 계산도 상상도 안되는 개천절 기념이 우리 삶에 무슨 의미로 존재하는 걸까 싶었다. 과연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뭇계산들에 무슨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걸까 생각했다.
반만년 역사의 속도로 비춰 보면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없이 많은 인간의 생과 사의 기계적인 교차가 진행되고 있다는 좀 더 현실적인 판단이 가능해지는 것 같다.
사람들이 잘난 계산 솜씨만 뽐내고 있을 게 아니라 그것보다는 인간의 장구한 역사에 걸 맞는 통 큰 삶을 살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다. 제 안에 찍힐 당당한 스스로의 모습을 그려내며 허물을 벗고 나설 시점이라는 얘기다. 그러기 위해선 작은 것에 연연하지 말고 세상일에 좀 더 초연하고 담대하게 맞붙는 호적수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음이다.
단, 지나친 자신감은 금물이다. 영글지도 않은 승리에 도취하면 더욱 더 안되겠다.
다시 상가로 돌아오니 누군가가 전화기 너머에서 숨가쁜 호홉을 내뿜고 있었다.
야권의 서울시장 후보로 박원순씨가 됐는데 재미있겠다라는 전언이었다. 이번 선거가 녹록치 않을 것 같다며 내년 총선과 대선 국면의 정치계산으로 복잡해진 심경을 내비쳤다.
흠.
정치 상황에서, 실제 일어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잘 이해해서 피가 되고 살이 되게 받아들일 수 있는냐에 달려있다는 내 답변을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다.
왠지 말개진 느낌이다.
장독대 뚜껑 덮는 기분으로 하루를 닫고 있는데, 어! 이 묘한 두근거림은 뭐지?
(2011.10.4)
...홍문종 생각
2011년 10월 2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짝퉁 원조는 일본이다
짝퉁 원조는 일본이다
독도나 동해 표기 문제 등으로 우리의 심기를 긁는 것으로도 모자랐나 보다.
嫌韓 분위기 조성에 나선 일본의 수상한 움직임이 갈수록 그 도를 더하는 양상이다.
조직적이고 악의적인 날조 비방으로 한계를 넘고 있다는 느낌이다.
오늘 우연히 유튜브에서 접한 동영상만 해도 그렇다.
일본 네티즌이 만든 문제의 동영상은 한일 간의 유사한 콘텐츠에 대해 무조건 한국이 일본을 모방했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으로 우리를 비하하고 있었다. 현대자동차가 혼다의 짝퉁이고 삼성이 일본 기업인 척 한다며 일본짝퉁의 천국이라는 억지로 한국 비방을 반복하는 식이었다. 세계가 인정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대표 브랜드, 현대나 삼성의 파워를 어떻게 보고 하는 망발인지 모르겠다.
새삼스럽지 않은 일이지만 적반하장 격으로 나오는 일본의 도발은 언제나 그렇듯 밉상스럽다. 좀처럼 간격이 좁혀지지 않는 (지리적으로)가깝고도 (심정적으로)먼 일본과의 화해는 정말 요원한 것일까?
1980년대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일본을 폄훼하는 미국 교수들이 적지 않게 봤다.
그들은 1960년대 일본 제품을 보면서 ‘일본제라 별 수 없다. 작동이 잘 안되거나 망가지기 일쑤다. 일본 제품에 뭘 바라겠느냐, 일본은 창조 능력이 없어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노벨상은 어림없는 일이고 결국 2등에 그치게 될 것'이라며 일본을 노골적으로 비하했다. 심지어 몇 몇 학자들은 전범 일본에 대해 ‘전쟁책임도 묻지 않고 국방을 지원하는 것은 물론 모방행위조차 문제 삼지 않는 미국의 지나친 관대함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일도 있었다.
주판알을 튕긴 결과이겠지만 실제로 미국은 2차 대전 종료된 이후 전범 책임자인 일본 천황의 목숨을 부지시켰고 독일을 분단 상황으로 만든 것과는 달리 일본에게는 통일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시혜를 베풀었다. 말하자면 미국 덕분에 경제대국 일본의 오늘이 존재하게 된 셈이다.
이후 모방의 천재, 경제적 동물로서 일본이 펼친 눈부신 활약상(?)은 모두가 다 아는 그대로다.
그렇고 그런 식으로 문화와 산업 기술의 짝퉁 천국 과정을 거쳐 경제대국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보은 차원에서였는지 인색한 본연의 모습과는 달리 미국에게만은 한없이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
백인 신드롬이 거론될 정도로 미국을 배려하고 닮고자 하는 일본사회의 각별한 노력들은 백인 숭배사상의 깊은 뿌리로 환치됐다. 일본 광고에 백인 모델이 다반사로 등장하는 현상이나 요즘은 어떤지 몰라도 과거 일본 동경 대학에서 발표할 때 일어보다 영어 사용에 더 호의적으로 반응하던 일본의 젊은이들의 모습도 이런 정서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며 일찍이 모방의 가치를 높이 산 아리스토텔레스의 선견지명에 동의한다. 결국 모방으로 시작해서 상대방을 능가하게 되고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창조가 창출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흐름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보다 앞서 있는 일본이나 미국 유럽을 모방한 사실을 부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것을 열심히 모방하고 있는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에 대해 나무라는 것도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무엇보다 유럽 경제 모방을 모토로 근대화를 이룬 과거를 가진 일본이 우리에게 짝퉁천국 운운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더욱이 최근 들어 한국의 전통 식품인 불고기나 김치, 심지어 막걸리에까지 특허를 시도하는 무모함을 보였던 그들이 말이다.
왕인이나 아직기를 들먹이지 않아도 일본문화가 우리 것을 모방한 사실은 곳곳에 베낀 흔적을 감추고 있는 일본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더 나아가 일왕이 한국인 혈통임을 그들 스스로 인정한 사실에 이르면 갑론을박 자체가 무의미하다.
결정적인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나름의 강점이 있다는 생각이다.
심지어 식민시대 일본의 수많은 악행이 있었지만 교육에 대한 일본인의 열정 같은 건 충분히 배울 만하다. 또 미국 침공을 감행한 나름의 대담함이나 자부심을 두고 취사선택할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나 역시 동경대학에서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배우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접했던 경험이 있다. 그런 경험들이 그들에 대한 부정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나로 하여금 후학들에게 일본 국민의 우수성을 배우라고 가르치게 하는 것 같다.
토인비 말처럼 문명의 중심이 아시아를 향하고 있는 시점이다.
이 시점에서는 희망을 품을 방도를 구축하는 게 바람직하다. 일본이 됐건 중국이 됐건 한국이 됐건 선의의 경쟁을 통해 서로를 보완하고 발전시켜 모두에게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건설적인 방향이 될 수 있도록 관심을 모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런 저런 수단을 통해 한국을 임의대로 조종하고자 하는 의도라면 일찌감치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머지 않아 발등을 찍는 부메랑으로 되돌아 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함부로 짝퉁이니 뭐니 거론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짝퉁 원조가 일본이라는 게 바꿀 수 없는 진실이 된 지 이미 오래다.
그야말로 순리대로 살 일이다.
(2011. 10. 2)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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