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판 소동
별들은 역시 위대했다.
국방부 장관의 야심찬 새해목표도 무산시킬 수 있는 가공의 위력을 보여줬다.
군 개혁의 일환으로 장군 차량의 별판과 장군 전용의 식당, 이발소 공간을 없애겠다던 국방부의 호기가 퇴직 장성들의 모임체인 ‘성우회’ 반발로 제동이 걸렸다는 소식이다.
군 개혁 의지가 쇠퇴한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별들의 기세등등한 반격에 국방부가 초반 기선을 제압당한 분위기다.
우리사회에서 별판을 단 차량이 막강한 권력의 상징으로 통용될 수 있는 배경을 설명하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그런 만큼 쉽사리 찬반의 입장을 정하기도 어렵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기존의 계급관념을 뛰어넘는 특별한 정서를 담아 바라봐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분단된 대한민국에서의 장군이 갖고 있는 특화된 존재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전시에 무한 책임을 져야하는 장군의 또 다른 기능을 염두에 두더라도 그들에 대한 공고한 신분 보장은 당연하다는 게 전통적인 관례이기도하다.
결정적인 순간, 그들의 판단에 따라 국가의 명운이 좌우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기왕에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각종 전쟁터에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장군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 역시 그들의 활동상황을 담은 전쟁 무용담도 수없이 접한 바 있다. 더구나 계급에 따른 상명하복 체계는 군 조직의 필수 덕목 중 하나로 치부되고 있다. 그런 만큼 상호간 계급에 대한 확실한 인지 기능이 갖는 의미는 생각보다 크다고 할 것이다.
군이 더 강해져야 하는 현실적 여건을 감안하더라도 일사분란한 지휘체계 강화의 필요성이 대두됐다고 할 것이다. 특히나 전시를 방불케 하는 긴장감을 유지해야하는 우리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그다지 많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럼에도 이번 ‘별판소동’ 과정에서 드러난 성우회의 처세는 상당히 실망스럽다. 신념보다는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안일함이 더 크게 비춰졌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장성 차량에 별판을 붙이고 안붙이고는 군개혁에 있어 그다지 중요한 관점이 아니다.
그러나 '예비역 장군들의 항의'때문에 별판을 허용하기로 방침이 바뀌는 것은 국방부 전체의 권위를 실추시킨 결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간단히 처리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런 성우회가 군의 명예와 예우를 들어 별판 부착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건 상당한 모순이다. 무엇보다 예의를 지켜 정중하게 대우할 대상을 선택하는 권한은 받는 쪽이 아니라 주는 쪽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예우의 대상이 당연한 권리로 여기는 순간, 본래의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리게 돼 있다. 강제할 수 없는 예우의 선천적 속성이 파괴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군대조직에서의 권위는 반드시 필요한 항목이다.
그러나 권위와 권위주의는 명백히 다르다. 기득권 유지를 위한 권위주의는 당연히 쇄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별판이나 달고 다니고 사병들에 비해 지나친 호의호식으로 일관하는 장군의 ‘권위주의’는 해당 장군의 미래 뿐 아니라 국가의 미래까지 망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반면 리더의 소신과 진정성으로 형성된 권위는 자발적인 복종으로 군 기강을 형성하는 지도자의 카리스마다 개념이다. 모방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일방적인 지시 일변도가 아닌 상호 교감을 통한 리더십만이 유사시 병사들이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충성심을 이끌어 낼수 있다. 그런 리더십이 진정한 의미의 ‘권위’가 아닐까 싶다. 이번 김관진 국방장관의 군 개혁 시동을 환영한다.
군 개혁의 일성으로 장군들의 특권의식을 지적한 점은 장관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박수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군 개혁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장벽이 될 수도 있을 장군들에게 스스로 거듭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는 의미에서 고무적이다. 하지만 상호존중이 없는 개혁은 상호분열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장관의 보다 신중한 처신이 요구된다는 생각이다. 개혁과정이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이번 성우회처럼 수많은 반대와 시비가 가로막고 나설 수 있다. 그러나 절대로 굴복하거나 주춤거려서는 안된다. 우호적인 국민 여론을 주 무기 삼아 군 개혁에 대한 비전과 신념을 제대로 한번 펼쳐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차량에 별판 다는 건 아무래도 좋다. 우리의 군이 믿고 따르고 정성으로 이끌고 가는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국민적 열망이 용두사미가 아닌 보다 큰 결실로 매듭 지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PS: "노병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라질 뿐이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소리없이 사라져간다는 의미로 군인의 소명의식을 강조했던 맥아더 장군의 큰 가르침을 지금 이순간 우리의 장군들이 한번쯤 되새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2011 . 1. 9)
...홍문종 생각
2011년 1월 9일 일요일
2011년 1월 7일 금요일
홍문종 생각 - 인과 응보를 생각하며
인과 응보를 생각하며
이 나이가 되도록 건강에 관해 크게 걱정한 경험이 없다.
그런 만큼 평소 건강관리에 상당히 무심했던 것도 사실이다.
때 마침 종합검진 통보도 있고 해서 이 참에 작심하고 내시경을 비롯해 시티촬영, MRI까지 총체적인 건강검진을 결행했는데 내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검진 4일 전부터 요구되는 수칙이 많았다. 절차도 생각보다 복잡했다.
첫 주문부터 무지막지(?)한 과제였다. 4리터 물통을 가득 채운 분말가루를 물에 타서, 그것도 오전 5시에서 7시 사이에 다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워낙 물먹기를 좋아했던 터라 별 생각없이 덤볐다가 아주 혼났다. 야행성 체질에 새벽시간 맞추는 것도 그렇고 두 시간 꼬박 4리터 분량을 다 해결하는 일도 절대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심한 메스꺼움이 고역이었다. 거기다 장세척으로 인한 설사가 계속되다보니 이건 거의 토사곽란 환자를 체험하는 듯 했다. 검사를 기다리는 동안 온갖 착잡한 생각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건강에 어려움을 겪던 친구들 얼굴부터 혹시 내게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이르기까지 뜻밖의 심리상태가 노출되는 것 같아 당혹스러웠다. 결과적으로는 해피앤딩이었다. 일주일 후 결과가 나오게 되어있는 혈액검사를 제외하고는 검사 결과를 당일 통보받았는데 혈압(100/60), 당뇨(100), 시력(각각 1.0) 등 각 신체 기능이 나이에 비해 굉장히 건강하다는 소견이었다. 심지어 건강관리를 아주 잘했다는 칭찬까지 들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서는데 장례식 장 건물의 영안실 사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이내 검사 중간 중간 검진 담당의와 죽음에 관해 나눴던 토막 대화들이 떠올랐다.
누구도 죽음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도 응급실을 거쳐 영안실로 옮겨지는 사망자의 상당수가 임종 순간까지도 본인만큼은 죽음에서 예외인 것처럼 생각한다고 한다. 결국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숙명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피하고 싶은 인간의 갈망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하겠다. 천년만년의 삶을 보장받기라도 한 것처럼 탐욕의 극치로 치닫는 볼썽사나운 모습이 목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인생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언젠가 직면하게 될 죽음을 의식한다면 좀 더 겸손하고 충실한 삶을 위해 노력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감이 생긴다. 그야말로 죽음이 삶의 질적 향상에 기여하게 되는 순기능 말이다.
콩 하나만 해도 뿌린대로 거두게 되는 것처럼, 죽음도 ‘인과응보’의 메커니즘이 적용될 수 있다니 흥미롭다. 사전 징후만 제대로 관찰해도 죽음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전문분야 관계자들의 진지한 견해이니만큼 관심을 기울여 볼 만하다는 생각이다.
건강검진 현장의 오랜 경험으로 수진자의 이력만 가지고도 병력이나 건강의 이상 유무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실제로 술 담배, 과로, 스트래스, 불규칙한 일상 등의 관련 데이터를 적용하면 수진 결과와 상당부분 일치하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결국 건강의 이상은 사전에 경고되는 징후들만 잘 챙겨도 예방이 가능하다는 소리다. 비약이 될지 모르지만 여타의 정황에서도 확인되는 바다. 실패로 돌아간 동계올림픽 유치나 FIFA 부회장 선거, 지난 번 지방선거에서의 한나라당 참패도 뿌린 대로 거둔 정직한 수확물이다. 깊은 속사정까지야 알수 없지만 오래 전부터 균열이 시작된 패인의 조짐이 진행되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 요인이 수정되지 않고 방치되는 상황이라면 그 대상이 사람이 됐건, 정당이 됐건 아무런 미래도 기약할 수 없게 된다. 정부정책도 마찬가지다. 안일한 외교로 협상능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나마 국제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될 게 뻔하다. 건강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자신감 때문에 자기 몸 살피기를 소홀히 한다면 반드시 몸에 이상이 오게 돼 있다.
누구나 성공적인 미래를 꿈꾼다.
성공적 미래는 다른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는 명제다. 세상 일엔 공짜가 없고 원인없는 결과는 더더욱 없기에 그렇다. 모든 일은 준비하기 나름이다. 하기에 따라 미래에 대한 엄청난 프리미엄과 스스로의 인생을 조정하는 놀라운 혜택을 얻을 수도 있다. 삶이 때로 많이 번거롭고 고통스럽긴 하지만 이 역시 완숙한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한다면 기꺼이 그 과정을 감수해 낼 에너지가 나오게 돼 있다. 결국 지금 이 순간이 미래의 내 모습을 반영하는 에너지의 실체인 셈이다. 건강 검진 받으면서 건져 올린 생각의 편린들이 혹여 여러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더 많이 웃는 하루 되시길.
(2011. 1. 7)
....홍문종 생각
이 나이가 되도록 건강에 관해 크게 걱정한 경험이 없다.
그런 만큼 평소 건강관리에 상당히 무심했던 것도 사실이다.
때 마침 종합검진 통보도 있고 해서 이 참에 작심하고 내시경을 비롯해 시티촬영, MRI까지 총체적인 건강검진을 결행했는데 내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검진 4일 전부터 요구되는 수칙이 많았다. 절차도 생각보다 복잡했다.
첫 주문부터 무지막지(?)한 과제였다. 4리터 물통을 가득 채운 분말가루를 물에 타서, 그것도 오전 5시에서 7시 사이에 다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워낙 물먹기를 좋아했던 터라 별 생각없이 덤볐다가 아주 혼났다. 야행성 체질에 새벽시간 맞추는 것도 그렇고 두 시간 꼬박 4리터 분량을 다 해결하는 일도 절대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심한 메스꺼움이 고역이었다. 거기다 장세척으로 인한 설사가 계속되다보니 이건 거의 토사곽란 환자를 체험하는 듯 했다. 검사를 기다리는 동안 온갖 착잡한 생각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건강에 어려움을 겪던 친구들 얼굴부터 혹시 내게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이르기까지 뜻밖의 심리상태가 노출되는 것 같아 당혹스러웠다. 결과적으로는 해피앤딩이었다. 일주일 후 결과가 나오게 되어있는 혈액검사를 제외하고는 검사 결과를 당일 통보받았는데 혈압(100/60), 당뇨(100), 시력(각각 1.0) 등 각 신체 기능이 나이에 비해 굉장히 건강하다는 소견이었다. 심지어 건강관리를 아주 잘했다는 칭찬까지 들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서는데 장례식 장 건물의 영안실 사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이내 검사 중간 중간 검진 담당의와 죽음에 관해 나눴던 토막 대화들이 떠올랐다.
누구도 죽음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도 응급실을 거쳐 영안실로 옮겨지는 사망자의 상당수가 임종 순간까지도 본인만큼은 죽음에서 예외인 것처럼 생각한다고 한다. 결국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숙명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피하고 싶은 인간의 갈망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하겠다. 천년만년의 삶을 보장받기라도 한 것처럼 탐욕의 극치로 치닫는 볼썽사나운 모습이 목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인생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언젠가 직면하게 될 죽음을 의식한다면 좀 더 겸손하고 충실한 삶을 위해 노력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감이 생긴다. 그야말로 죽음이 삶의 질적 향상에 기여하게 되는 순기능 말이다.
콩 하나만 해도 뿌린대로 거두게 되는 것처럼, 죽음도 ‘인과응보’의 메커니즘이 적용될 수 있다니 흥미롭다. 사전 징후만 제대로 관찰해도 죽음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전문분야 관계자들의 진지한 견해이니만큼 관심을 기울여 볼 만하다는 생각이다.
건강검진 현장의 오랜 경험으로 수진자의 이력만 가지고도 병력이나 건강의 이상 유무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실제로 술 담배, 과로, 스트래스, 불규칙한 일상 등의 관련 데이터를 적용하면 수진 결과와 상당부분 일치하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결국 건강의 이상은 사전에 경고되는 징후들만 잘 챙겨도 예방이 가능하다는 소리다. 비약이 될지 모르지만 여타의 정황에서도 확인되는 바다. 실패로 돌아간 동계올림픽 유치나 FIFA 부회장 선거, 지난 번 지방선거에서의 한나라당 참패도 뿌린 대로 거둔 정직한 수확물이다. 깊은 속사정까지야 알수 없지만 오래 전부터 균열이 시작된 패인의 조짐이 진행되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 요인이 수정되지 않고 방치되는 상황이라면 그 대상이 사람이 됐건, 정당이 됐건 아무런 미래도 기약할 수 없게 된다. 정부정책도 마찬가지다. 안일한 외교로 협상능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나마 국제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될 게 뻔하다. 건강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자신감 때문에 자기 몸 살피기를 소홀히 한다면 반드시 몸에 이상이 오게 돼 있다.
누구나 성공적인 미래를 꿈꾼다.
성공적 미래는 다른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는 명제다. 세상 일엔 공짜가 없고 원인없는 결과는 더더욱 없기에 그렇다. 모든 일은 준비하기 나름이다. 하기에 따라 미래에 대한 엄청난 프리미엄과 스스로의 인생을 조정하는 놀라운 혜택을 얻을 수도 있다. 삶이 때로 많이 번거롭고 고통스럽긴 하지만 이 역시 완숙한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한다면 기꺼이 그 과정을 감수해 낼 에너지가 나오게 돼 있다. 결국 지금 이 순간이 미래의 내 모습을 반영하는 에너지의 실체인 셈이다. 건강 검진 받으면서 건져 올린 생각의 편린들이 혹여 여러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더 많이 웃는 하루 되시길.
(2011. 1. 7)
....홍문종 생각
2011년 1월 6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모두가 제자리에서
모두가 제자리에서
프랑스에서 대한민국 아이콘이 빛을 발했다.
프랑스 국영 TV가 대한민국의 잠재적 저력에 포커스를 맞춘 다큐 프로그램을 제작해서 프랑스 전역에 소개했는데 우리로서는 모처럼의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가 대한민국을 주목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국가 전체가 무기력증에 빠져 침체일로를 걷고 있는 프랑스 내부의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대한민국 사회의 역동성을 통해 자국민의 의식을 자극하고자 하는 의도도 일정 정도 담겨 있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그들의 107분짜리 다큐 동영상에 투영된 대한민국은 열정과 저력이 넘치는 가능성의 나라였다.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으로 끊임없는 위기 속에서도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은 물론 문화적으로도 주변국을 리드할 정도의 성과를 올리고 있는 비전의 땅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심지어 우리 사회의 갈등국면과 소모적 논쟁까지도 그들에게는 열정과 활기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이는 최근 93세의 레지스탕스 출신이 쓴 저서가 프랑스 서점가에서 상종가를 치며 신기록을 세우고 있는 현상에서도 엿보이는 정서다. 최근 석 달 동안 60만 권이 팔려나갔다는 이 책은 프랑스 젊은이들에게 '선대가 그랬던 것처럼 부당한 일에 항거하고 화를 내라‘는 단순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지면이 고작 30쪽인 간이책자에 불과한 이 책의 선풍적인 인기몰이 배경을 살피다보면 프랑스 사회의 깊은 고민의 일단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끼리는 날마다 지지고 볶는 형국이지만 외부에서 긍정적 평가를 듣게 되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여러 부분의 징후들을 보면 이마저도 마냥 안심할 처지는 아닐 듯싶다.
평균 수명 상승의 여파인지 요즘 들어 나이가 점점 숫자에 불과해지는 현상을 보게 된다. 신체적으로도 월등히 젊어졌다. 61세 생일을 환갑이라는 특별 의식으로 장수를 축하하던 관습이 무색해질 정도다.
그럼에도 고정관념의 파고를 뛰어넘지 못하고 스스로를 얽매고 제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무엇보다도 그런 식으로 양산되는 실업자가 적지 않은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걱정이 크다.
이제 막 50이 지난 나이에 현직에서 명퇴하거나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잉여인간군으로 전락해가는 모습은 안타깝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도양양했던 사람들이 한 순간 뒷방 노인의 행색이 되어 있는 현실은 서글프기까지 하다. 측은함을 넘어 화가 치민다. 그들의 현실이 개인이 아닌 국가나 사회적 영역 차원에서 책임져야 할 사안이라는 생각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다.
하고자 하는 의욕만 있으면 되는데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듯하다.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는 힘과 정신력을 겸비하고도 고정관념 때문에 스스로를 포기하는 패배주의가 문제라고 본다. 사회적인 편견도 걸림돌이 되기는 마찬가지다.
특별히 노령화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그들의 노동력이 사회발전을 위해 어떤 형태로든 기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시스템이 구축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출산 고령화 사회 영역까지도 악순환의 고리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당사자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제대로 인식하고 있어야겠다.
엄격히 말한다면 젊은이들에게 투쟁하라고, 무기력에서 벗어나라고 독려하는 프랑스 형편이나 우리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지나친 비관일까? 무엇보다 방황하는 청춘들의 핏기 잃은 고뇌를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학생일 때는 점수에 볼모 잡혀 푸른 꿈을 짓눌렸던 그들이 학교 문을 나서고도 굳게 닫힌 취업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모습이다.
젊은이 특유의 진취적 기상과 폭발적인 도전정신들이 희미해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대한민국의 꿈나무들이다. 그들이 무너지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언제까지 이들의 방황하는 발길을 지켜보고 있어야하는 건지 선뜻 답을 낼 수 없어 답답하다. 물론 정금을 얻기 위해선 까다로운 공정과 엄격하고 혹독한 단련 과정이 불가피하다. 젊은이들에게도 대한민국의 미래를 동량이 되기까지 필요한 내공을 수련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비판과 도전 정신 역시 젊은이들을 가장 젊은이답게 만드는 조건이다. 또 그들의 조건이 충족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할 책임은 기성세대에 있다. 경우에 따라 이들의 정당한 비판이나 도전에 대해서는 상으로 격려하는 센스가 있어야겠다.
한 나라의 과거를 보려면 박물관에 가고 현재를 보려면 시장에 가고 미래를 보려면 학교에 가보라는 말이 있다. 젊은이는 젊은이답게, 노인은 노인답게 저마다의 역할에 충실하고 스스로의 책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21세기 대한민국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바른 모습이 아닐까 한다. 모두가 저마다의 자리를 지키는 것 말이다.
모든 이들의 무운을 빈다.
(2011. 1. 6)
....홍문종 생각
프랑스에서 대한민국 아이콘이 빛을 발했다.
프랑스 국영 TV가 대한민국의 잠재적 저력에 포커스를 맞춘 다큐 프로그램을 제작해서 프랑스 전역에 소개했는데 우리로서는 모처럼의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가 대한민국을 주목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국가 전체가 무기력증에 빠져 침체일로를 걷고 있는 프랑스 내부의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대한민국 사회의 역동성을 통해 자국민의 의식을 자극하고자 하는 의도도 일정 정도 담겨 있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그들의 107분짜리 다큐 동영상에 투영된 대한민국은 열정과 저력이 넘치는 가능성의 나라였다.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으로 끊임없는 위기 속에서도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은 물론 문화적으로도 주변국을 리드할 정도의 성과를 올리고 있는 비전의 땅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심지어 우리 사회의 갈등국면과 소모적 논쟁까지도 그들에게는 열정과 활기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이는 최근 93세의 레지스탕스 출신이 쓴 저서가 프랑스 서점가에서 상종가를 치며 신기록을 세우고 있는 현상에서도 엿보이는 정서다. 최근 석 달 동안 60만 권이 팔려나갔다는 이 책은 프랑스 젊은이들에게 '선대가 그랬던 것처럼 부당한 일에 항거하고 화를 내라‘는 단순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지면이 고작 30쪽인 간이책자에 불과한 이 책의 선풍적인 인기몰이 배경을 살피다보면 프랑스 사회의 깊은 고민의 일단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끼리는 날마다 지지고 볶는 형국이지만 외부에서 긍정적 평가를 듣게 되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여러 부분의 징후들을 보면 이마저도 마냥 안심할 처지는 아닐 듯싶다.
평균 수명 상승의 여파인지 요즘 들어 나이가 점점 숫자에 불과해지는 현상을 보게 된다. 신체적으로도 월등히 젊어졌다. 61세 생일을 환갑이라는 특별 의식으로 장수를 축하하던 관습이 무색해질 정도다.
그럼에도 고정관념의 파고를 뛰어넘지 못하고 스스로를 얽매고 제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무엇보다도 그런 식으로 양산되는 실업자가 적지 않은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걱정이 크다.
이제 막 50이 지난 나이에 현직에서 명퇴하거나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잉여인간군으로 전락해가는 모습은 안타깝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도양양했던 사람들이 한 순간 뒷방 노인의 행색이 되어 있는 현실은 서글프기까지 하다. 측은함을 넘어 화가 치민다. 그들의 현실이 개인이 아닌 국가나 사회적 영역 차원에서 책임져야 할 사안이라는 생각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다.
하고자 하는 의욕만 있으면 되는데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듯하다.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는 힘과 정신력을 겸비하고도 고정관념 때문에 스스로를 포기하는 패배주의가 문제라고 본다. 사회적인 편견도 걸림돌이 되기는 마찬가지다.
특별히 노령화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그들의 노동력이 사회발전을 위해 어떤 형태로든 기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시스템이 구축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출산 고령화 사회 영역까지도 악순환의 고리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당사자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제대로 인식하고 있어야겠다.
엄격히 말한다면 젊은이들에게 투쟁하라고, 무기력에서 벗어나라고 독려하는 프랑스 형편이나 우리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지나친 비관일까? 무엇보다 방황하는 청춘들의 핏기 잃은 고뇌를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학생일 때는 점수에 볼모 잡혀 푸른 꿈을 짓눌렸던 그들이 학교 문을 나서고도 굳게 닫힌 취업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모습이다.
젊은이 특유의 진취적 기상과 폭발적인 도전정신들이 희미해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대한민국의 꿈나무들이다. 그들이 무너지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언제까지 이들의 방황하는 발길을 지켜보고 있어야하는 건지 선뜻 답을 낼 수 없어 답답하다. 물론 정금을 얻기 위해선 까다로운 공정과 엄격하고 혹독한 단련 과정이 불가피하다. 젊은이들에게도 대한민국의 미래를 동량이 되기까지 필요한 내공을 수련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비판과 도전 정신 역시 젊은이들을 가장 젊은이답게 만드는 조건이다. 또 그들의 조건이 충족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할 책임은 기성세대에 있다. 경우에 따라 이들의 정당한 비판이나 도전에 대해서는 상으로 격려하는 센스가 있어야겠다.
한 나라의 과거를 보려면 박물관에 가고 현재를 보려면 시장에 가고 미래를 보려면 학교에 가보라는 말이 있다. 젊은이는 젊은이답게, 노인은 노인답게 저마다의 역할에 충실하고 스스로의 책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21세기 대한민국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바른 모습이 아닐까 한다. 모두가 저마다의 자리를 지키는 것 말이다.
모든 이들의 무운을 빈다.
(2011. 1. 6)
....홍문종 생각
2011년 1월 5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배려가 왕도다
배려가 왕도다
<블로그 독자 여러분, 기뻐해 주시라. 저, 홍문종이 인기 짱인 카운슬러가 됐다.>
직업 때문인지 개인적 특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근래 들어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실제로 학업을 고민하는 학생부터 사업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주로 성적, 진로, 직장, 결혼, 가정, 사업 등 인생의 전반적인 문제점에 대한 해결을 구하며 나를 찾고 있는 현상이 두드러지는 요즈음이다.
오늘만 해도 여러 명의 지인을 만나 어려워진 회사경영이나 원활하지 못한 가정 문제를 고민하는 하소연을 들었다.
그래봤자 열심히 들어주고 함께 고민하는 정도다. 그런데도 나를 찾는 이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나의 주특기 덕분인 것 같다. 거기다 나름대로 진정성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려는 나의 성실성이 상대방에게 위로가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러다 조만간 카운슬러계의 지존으로 명성을 날리게 될 것 같은 예감이... 여기 김치국 한사발이오!!)
상담을 하다 보니 생각보다 세상이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본의 아니게 다른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되면서 간접경험으로 오히려 세상을 배우는 덤을 챙기는 재미도 꽤나 쏠쏠하다. 그동안 우리의 사회적 패턴은 확실히 많이 변했다.
대표적인 변화는 집단적이고 물질 위주로 흐르던 기존 질서 대신 개인의 감성과 정신적 추구가 더 큰 가치로 평가되고 있다. 개인의 만족도나 정신적 평화가 가족이나 집단의 안위보다 우선시 되거나 행복의 주된 주제로 설정되는 자체가 낯설지 않은 분위기다. 기존의 사회적 질서나 가치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기준으로 빠르게 전환되는 현상이 새로운 규칙으로 형성되고 있는 정황도 빼놓을 수 없겠다.
이제는 뭐든지 개인의 개성이 우선인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객관적인 정황 보다는 주관적인 동의가 판단의 중요한 근거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정말로 실감난다. 아무리 완벽한 행복의 요소를 갖췄다고 해도 당사자의 용인이 없다면 그건 행복이 아닌 것이다.
그런 정황에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건 아니다.
독특하고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개인취향을 존중하다 보면 모두가 만족할만한 합의점 도출이 쉽지 않다는 게 문제다. 자칫 사공이 난립해 배가 산으로 가거나 지루한 줄다리기로 적절한 시기를 놓쳐 낭패를 볼 수도 있다. 극단적인 예가 되겠지만 심지어 사제지간 관계에서조차 개인 존중이 부적절한 형태로 표출되는 광경을 적지 않게 목격하게 되는 현실이다.
그렇다고 무력이나 권력의 힘을 빌어 무조건 압박하고 강요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강요의 형태로는 절대 대중의 동조를 이끌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특히 지도자의 리더십에 있어 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한 사안이다. 수많은 지도자가 실패한 배경도, 교실에서 좋은 교육이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다 여기에 있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대중 설득이 쉽지 않은 것은 개인의 입장이 고려되지 않은 원인이 가장 클 수 있다. 개개인의 납득과 동조를 얻어내지 못하면 한낱 빈 구호로 치부될 수 밖에 없다. 지도자가 제시하는 미래 비전이 반향을 얻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 다. 결과적으로 타협과 동의가 리더십의 성공여부를 가름하는 주요 변수가 되는 셈이다.
이는 새해가 되면서 이런 저런 목적으로 2012년 선거판을 준비하느라 분주해진 사람들도 귀담아 들어야 할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수많은 정책을 담은 공약들이 쏟아져 나올 테지만 개개인의 행복을 배려하지 않고는 아무리 훌륭한 내용을 담는다 해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유권자의 마음을 얻을 수 없는 결정적 하자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상대의 마음을 열고 타협과 동의를 얻어낼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역지사지 입장에서 상대를 헤아릴 수 있는 눈높이로 접근해야 한다.
상담하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상담은 사람들의 애로사항을 들어주고 공감하는 것만으로 소기의 목적이 달성된다. 정책이나 공약을 입안하는 과정에서도 다양한 계층을 찾아다니며 그들이 말하는 어려움과 문제점을 수렴하고 거기에 따뜻한 배려를 덧입힌다면 그 공약이나 정책은 당연히 성공하게 돼 있다.
특히 선거를 통해 유권자의 표를 먹고 사는 정치인의 경우, 대중을 향해 귀를 열어 크게 듣겠다는 자세만으로도 절반의 성공이 보장된다. 거기다 따뜻한 가슴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지혜로운 처신이 가능하다면 금상첨화다.
귀가 솔깃해지는 희소식일 것이다.
서로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가 사이가 틀어져 버린 '여우와 두루미'라는 이솝 우화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우가 납작한 접시 대신 목이 긴 병으로 주둥이가 긴 학의 식사 방법을 배려했다면, 두루미가 목이 긴 병으로는 결코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여우의 입장을 배려했다면 이들의 우정은 더욱 공고해졌을 것이다.
국민을 대하는 정치인의 마음이 이와 같다면 최소한 국민으로부터 외면 당할 걱정은 안해도 될 것이다. 실천하기까지 어려울 것도 없다. 그저 존중하고 배려하면 된다.
그렇게 한번, 굽어진 정치현실을 바로 펴는 시작을 지금 시도해 보면 어떨까 싶다.
아무리 생각해도 배려가 왕도라는 건 만고의 진리임에 틀림없다.
(2010.1. 5)
....홍문종 생각
<블로그 독자 여러분, 기뻐해 주시라. 저, 홍문종이 인기 짱인 카운슬러가 됐다.>
직업 때문인지 개인적 특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근래 들어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실제로 학업을 고민하는 학생부터 사업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주로 성적, 진로, 직장, 결혼, 가정, 사업 등 인생의 전반적인 문제점에 대한 해결을 구하며 나를 찾고 있는 현상이 두드러지는 요즈음이다.
오늘만 해도 여러 명의 지인을 만나 어려워진 회사경영이나 원활하지 못한 가정 문제를 고민하는 하소연을 들었다.
그래봤자 열심히 들어주고 함께 고민하는 정도다. 그런데도 나를 찾는 이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나의 주특기 덕분인 것 같다. 거기다 나름대로 진정성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려는 나의 성실성이 상대방에게 위로가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러다 조만간 카운슬러계의 지존으로 명성을 날리게 될 것 같은 예감이... 여기 김치국 한사발이오!!)
상담을 하다 보니 생각보다 세상이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본의 아니게 다른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되면서 간접경험으로 오히려 세상을 배우는 덤을 챙기는 재미도 꽤나 쏠쏠하다. 그동안 우리의 사회적 패턴은 확실히 많이 변했다.
대표적인 변화는 집단적이고 물질 위주로 흐르던 기존 질서 대신 개인의 감성과 정신적 추구가 더 큰 가치로 평가되고 있다. 개인의 만족도나 정신적 평화가 가족이나 집단의 안위보다 우선시 되거나 행복의 주된 주제로 설정되는 자체가 낯설지 않은 분위기다. 기존의 사회적 질서나 가치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기준으로 빠르게 전환되는 현상이 새로운 규칙으로 형성되고 있는 정황도 빼놓을 수 없겠다.
이제는 뭐든지 개인의 개성이 우선인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객관적인 정황 보다는 주관적인 동의가 판단의 중요한 근거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정말로 실감난다. 아무리 완벽한 행복의 요소를 갖췄다고 해도 당사자의 용인이 없다면 그건 행복이 아닌 것이다.
그런 정황에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건 아니다.
독특하고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개인취향을 존중하다 보면 모두가 만족할만한 합의점 도출이 쉽지 않다는 게 문제다. 자칫 사공이 난립해 배가 산으로 가거나 지루한 줄다리기로 적절한 시기를 놓쳐 낭패를 볼 수도 있다. 극단적인 예가 되겠지만 심지어 사제지간 관계에서조차 개인 존중이 부적절한 형태로 표출되는 광경을 적지 않게 목격하게 되는 현실이다.
그렇다고 무력이나 권력의 힘을 빌어 무조건 압박하고 강요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강요의 형태로는 절대 대중의 동조를 이끌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특히 지도자의 리더십에 있어 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한 사안이다. 수많은 지도자가 실패한 배경도, 교실에서 좋은 교육이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다 여기에 있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대중 설득이 쉽지 않은 것은 개인의 입장이 고려되지 않은 원인이 가장 클 수 있다. 개개인의 납득과 동조를 얻어내지 못하면 한낱 빈 구호로 치부될 수 밖에 없다. 지도자가 제시하는 미래 비전이 반향을 얻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 다. 결과적으로 타협과 동의가 리더십의 성공여부를 가름하는 주요 변수가 되는 셈이다.
이는 새해가 되면서 이런 저런 목적으로 2012년 선거판을 준비하느라 분주해진 사람들도 귀담아 들어야 할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수많은 정책을 담은 공약들이 쏟아져 나올 테지만 개개인의 행복을 배려하지 않고는 아무리 훌륭한 내용을 담는다 해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유권자의 마음을 얻을 수 없는 결정적 하자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상대의 마음을 열고 타협과 동의를 얻어낼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역지사지 입장에서 상대를 헤아릴 수 있는 눈높이로 접근해야 한다.
상담하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상담은 사람들의 애로사항을 들어주고 공감하는 것만으로 소기의 목적이 달성된다. 정책이나 공약을 입안하는 과정에서도 다양한 계층을 찾아다니며 그들이 말하는 어려움과 문제점을 수렴하고 거기에 따뜻한 배려를 덧입힌다면 그 공약이나 정책은 당연히 성공하게 돼 있다.
특히 선거를 통해 유권자의 표를 먹고 사는 정치인의 경우, 대중을 향해 귀를 열어 크게 듣겠다는 자세만으로도 절반의 성공이 보장된다. 거기다 따뜻한 가슴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지혜로운 처신이 가능하다면 금상첨화다.
귀가 솔깃해지는 희소식일 것이다.
서로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가 사이가 틀어져 버린 '여우와 두루미'라는 이솝 우화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우가 납작한 접시 대신 목이 긴 병으로 주둥이가 긴 학의 식사 방법을 배려했다면, 두루미가 목이 긴 병으로는 결코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여우의 입장을 배려했다면 이들의 우정은 더욱 공고해졌을 것이다.
국민을 대하는 정치인의 마음이 이와 같다면 최소한 국민으로부터 외면 당할 걱정은 안해도 될 것이다. 실천하기까지 어려울 것도 없다. 그저 존중하고 배려하면 된다.
그렇게 한번, 굽어진 정치현실을 바로 펴는 시작을 지금 시도해 보면 어떨까 싶다.
아무리 생각해도 배려가 왕도라는 건 만고의 진리임에 틀림없다.
(2010.1. 5)
....홍문종 생각
홍문종 생각 - 더불어 함께 가자
더불어 함께 가자
새해다.
어제나 오늘이나 뭐가 다른 건지 잘 모르겠지만 새해라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한다.
그래도 새해가 되면 넘치는 공약들이 덤덤한 일상을 빼곡히 채운 시간표 사이를 누비고 있다. 살아 숨 쉬는 징표로써의 제 기능을 다하고 있다. 실제로 금연이나 금주, 다이어트 등 일상과의 단순한 약속부터 일생일대의 목표에 이르기까지 인생을 설계하는 결심들이 한번 쯤은 들어가 있기 마련이다. 작심삼일로 반복되는 결말까지도.
인생을 아무런 목표 없이 마구잡이로 살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기에는 우리가 마주한 삶의 순간이 중차대하다. 낮은 실행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목표설정과 갱신 과정을 반복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일지 모른다.
인생의 계획은 삶의 목표점을 향하는 과정을 안내해주는 네비게이션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
가고자 하는 목표점을 설정해 놓고 어떤 과정을 통해 가는 것이 좋을 지 길잡이가 되는 순기능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안내 받은대로 따르다 보면 어느 결에 목표점에 도달해 있는 것처럼 인생의 계획도 삶의 여정을 좀 더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네비게이션(계획)이 길 찾기의 모든 문제점을 해결해주는 만능은 아니다. 완벽한 기능이었다면 모든 인생은 단 하나의 유형으로 고정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최상의 결론이 해답으로 나와있는 예측가능한 삶이라면 무슨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불완정한 삶의 여정 자체가 우리 인생의 진정한 축복일 수도 있다.
목표점에 도달하기까지 각각의 경우에 맞는 방식을 얼마나 세밀하게 동원할 수 있느냐에 따라 그 결말을 달리하게 된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이러니하지만 삶의 묘미가 거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속도로가 빠르다고 해서 그 길이 최선인 것은 아니다. 누구나 그 길을 선택하게 된다면 우선 당장 몰려든 차량으로 인해 교통체증이라는 돌발 변수가 불가피하다.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평가를 달리해야 하는 새로운 과정이 시작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가장 수월해 보이는 선택이 가장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걸어갈 수 밖에 없는 여건인데 고속도로를 거쳐야 한다거나 자동차로 좁은 오솔길 주행해야 하는 불합리한 선택에 봉착될 경우도 있다. 판단에 따라 상황이 반전되기도 한다. 과감히 상황에 맞는 재선택이 요구된다.
돌발상황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면 계속해서 잘못된 방향으로 치닫는 악순환의 덫에 갇히게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 인생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상존한다. 지나치게 수월한 해결책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요구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도달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세상 일에는 공짜가 없다.
목표를 이뤄가는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들이 적지 않다. 정보를 전달하는 메신저의 성향도 중요한 변수 중 하나다. 교과서적인 방법은 정도를 걸을 수 있으나 고리타분한 속성으로 시대에 뒤처질 수 있다는 부담이 있다. IT 시대의 첨단 과학을 통한 정보는 검증이 덜 될 수 있어 자칫 실패에 이르기 쉽다. 적, 특히 친구로 위장한 적이 정보의 메신저가 되는 경우, 의도된 함정에 빠지게 되면 상황을 크게 악화시킬 우려가 크다. 어떤 상대로부터 정보를 취득하느냐에 따라 그에 대응하는 각각의 입장이 정리돼 있어야 한다.
비용 문제 역시 목표달성에 있어 변수로 작용하는 요소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이동하는 경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이겠지만 4000만 국민이 대상이 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시간이라는 특정 부분의 효율성만 고려됐을 뿐, 수용성이나 비용 측면에서 적합한 방안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과는 달리 국가차원의 목표 설정시에는 고려해야 할 변수가 많다. 개인은 목표를 이루겠다는 의지가 중요하지만 국가나 사회적 차원은 다르다. 4대강 사업이나 종편 선정 과정은 물론 세종시 결론에서 볼 수 있듯 국가 사업은 목표달성에 대한 의지보다는 국민적 공감대 충족 여부가 더 중요한 선택 기준이 돼야 한다. 국민적 동의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성공시킬 생각을 언감생심 염두에 두지도 않는 '민본 정치'여야 할 것이다. 이를 무시하다간 자칫 의욕만 앞섰던 탐욕의 정권이 겪었던 전철을 답습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국가 차원의 목표 설정에는 삶에 지친 국민들에 대한 배려가 우선돼야겠다. 당리당략 보다는 국민의 좌절을 세심하고 따뜻한 관심으로 품을 수 있는 정치가 답이다.
저마다 그럴 듯한 신년 계획을 위해 에너지를 모으는 이 때,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꿈 한조각을함께 심어보자. 더불어 함께 사는 터전을 통해 희망을 설계해보자.
어제나 오늘이나 뭐가 다른 건지 잘 모르겠지만 새해라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한다.
그래도 새해가 되면 넘치는 공약들이 덤덤한 일상을 빼곡히 채운 시간표 사이를 누비고 있다. 살아 숨 쉬는 징표로써의 제 기능을 다하고 있다. 실제로 금연이나 금주, 다이어트 등 일상과의 단순한 약속부터 일생일대의 목표에 이르기까지 인생을 설계하는 결심들이 한번 쯤은 들어가 있기 마련이다. 작심삼일로 반복되는 결말까지도.
인생을 아무런 목표 없이 마구잡이로 살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기에는 우리가 마주한 삶의 순간이 중차대하다. 낮은 실행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목표설정과 갱신 과정을 반복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일지 모른다.
인생의 계획은 삶의 목표점을 향하는 과정을 안내해주는 네비게이션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
가고자 하는 목표점을 설정해 놓고 어떤 과정을 통해 가는 것이 좋을 지 길잡이가 되는 순기능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안내 받은대로 따르다 보면 어느 결에 목표점에 도달해 있는 것처럼 인생의 계획도 삶의 여정을 좀 더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네비게이션(계획)이 길 찾기의 모든 문제점을 해결해주는 만능은 아니다. 완벽한 기능이었다면 모든 인생은 단 하나의 유형으로 고정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최상의 결론이 해답으로 나와있는 예측가능한 삶이라면 무슨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불완정한 삶의 여정 자체가 우리 인생의 진정한 축복일 수도 있다.
목표점에 도달하기까지 각각의 경우에 맞는 방식을 얼마나 세밀하게 동원할 수 있느냐에 따라 그 결말을 달리하게 된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이러니하지만 삶의 묘미가 거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속도로가 빠르다고 해서 그 길이 최선인 것은 아니다. 누구나 그 길을 선택하게 된다면 우선 당장 몰려든 차량으로 인해 교통체증이라는 돌발 변수가 불가피하다.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평가를 달리해야 하는 새로운 과정이 시작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가장 수월해 보이는 선택이 가장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걸어갈 수 밖에 없는 여건인데 고속도로를 거쳐야 한다거나 자동차로 좁은 오솔길 주행해야 하는 불합리한 선택에 봉착될 경우도 있다. 판단에 따라 상황이 반전되기도 한다. 과감히 상황에 맞는 재선택이 요구된다.
돌발상황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면 계속해서 잘못된 방향으로 치닫는 악순환의 덫에 갇히게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 인생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상존한다. 지나치게 수월한 해결책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요구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도달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세상 일에는 공짜가 없다.
목표를 이뤄가는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들이 적지 않다. 정보를 전달하는 메신저의 성향도 중요한 변수 중 하나다. 교과서적인 방법은 정도를 걸을 수 있으나 고리타분한 속성으로 시대에 뒤처질 수 있다는 부담이 있다. IT 시대의 첨단 과학을 통한 정보는 검증이 덜 될 수 있어 자칫 실패에 이르기 쉽다. 적, 특히 친구로 위장한 적이 정보의 메신저가 되는 경우, 의도된 함정에 빠지게 되면 상황을 크게 악화시킬 우려가 크다. 어떤 상대로부터 정보를 취득하느냐에 따라 그에 대응하는 각각의 입장이 정리돼 있어야 한다.
비용 문제 역시 목표달성에 있어 변수로 작용하는 요소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이동하는 경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이겠지만 4000만 국민이 대상이 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시간이라는 특정 부분의 효율성만 고려됐을 뿐, 수용성이나 비용 측면에서 적합한 방안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과는 달리 국가차원의 목표 설정시에는 고려해야 할 변수가 많다. 개인은 목표를 이루겠다는 의지가 중요하지만 국가나 사회적 차원은 다르다. 4대강 사업이나 종편 선정 과정은 물론 세종시 결론에서 볼 수 있듯 국가 사업은 목표달성에 대한 의지보다는 국민적 공감대 충족 여부가 더 중요한 선택 기준이 돼야 한다. 국민적 동의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성공시킬 생각을 언감생심 염두에 두지도 않는 '민본 정치'여야 할 것이다. 이를 무시하다간 자칫 의욕만 앞섰던 탐욕의 정권이 겪었던 전철을 답습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국가 차원의 목표 설정에는 삶에 지친 국민들에 대한 배려가 우선돼야겠다. 당리당략 보다는 국민의 좌절을 세심하고 따뜻한 관심으로 품을 수 있는 정치가 답이다.
저마다 그럴 듯한 신년 계획을 위해 에너지를 모으는 이 때,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꿈 한조각을함께 심어보자. 더불어 함께 사는 터전을 통해 희망을 설계해보자.
(2010 . 1. 4)
....홍문종 생각
2011년 1월 3일 월요일
홍문종 생각 - 사자성어
사자성어
해마다 연말연시면 각종 사자성어들이 넘친다.
촌철살인의 현실 비판과 풍자의 대리만족이 주는 매력 때문인지 반향도 큰 편이다. 중 전국의 대학교수들이 매년 연말과 연초에 각각 선정해서 발표하는 사자성어가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1년을 '장두노미'(藏頭露尾)로 선정, 진실을 감추려는 정부의 어리석음을 꼬집었던 이들이 이번에는 ‘민귀군경’(民貴君輕)으로 신묘년 새해 희망에 대한 기대감을 표명했다. 백성이 제일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임금이 제일 가볍다'는 뜻이란다.
왜 하필 맹자의 민본 사상인지 모두가 무겁게 고민해야 할 사회적 명제가 아닌가 싶다.
우리 사회의 정신적 리더격인 대학교수들이 국민존중 화두를 환기시킬 때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 들어 대다수의 국민들이 편치 않은 일상을 보내고 있는데 안보불안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관권이 인권을 경시하고 부자가 빈자 위에 군림하며 권력의 횡포가 자정되지 않는다는 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사상최대의 무역흑자와 4.5%의 경제성장, 외교적 역량이 확장되고 국격이 높아졌다는 '낭보‘를 쏟아내도 박탈감에 시달리는 국민에게는 허공의 메아리 일 뿐이다.
임기 4년차에 접어들면서 레임덕이 본격화 되는 느낌이다. 곳곳에서 권력누수 조짐이 목격되고 있다. 다른 정권과 유사한 경로를 걷고 있는듯 한데 나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레임덕이 본격화되면 이를 피하기 위한 권력 중심부의 무리수가 커지기 마련이다. 권력 기관들의 눈치보기도 늘어날 수 밖에 없다. 그럴수록 '민귀군경'의 충고가 절실할 테지만 현실은 그다지 녹록한 편은 아니다. 민심 위에 군림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속성 때문이다.
권력의 중심부의 있는 사람들이 권력에 취해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니 더 큰 문제다. 어차피 무위로 돌아가게 돼 있는 권력인데 그 한계점을 잊고 마치 영원무궁한 절대치를 소유한 마냥 현실을 망각하기 일쑤다. 국민을 틀어 쥐려는 권력이 성공한 예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모든 것이 환타지의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인정하게 될 때까 그 헛된 시도를 멈추지 못하니 큰일이다.
간과할 수 없는 건 훨씬 나빠진 정국 상황이다.
대학교수들이 선정한 사자성어의 변환과정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정황이다.
2009년 말엔 '방기곡경'으로 바른 길을 좇아 정당하게 일하지 않고 그릇된 수단을 써서 억지로 일을 한다고 정부정책을 비판한 바 있다. 그 1년 뒤인 2010년 사자성어는 '장두노미'였다.
그러던 것이 2011년 새 사자성어는 더 강경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 바로 '민귀군경'이다. 계속 그런 식의 실정이 이어진다면 사직이나 임금보다 훨씬 귀한 백성을 위해 모종의 조치를 취할 가능성을 시사하는 사자성어다. 중요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임금을 희생시킬 수도 있다는 아주 무서운 선언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공공연히 민란 봉기를 선동하는 움직임이 없는 것도 아니다. 과거와 달라진 풍경이라 하겠다. 우리가 사자성어를 관전하는 포인트를 여기에 둬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대통령의 신년사는 민심을 읽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좋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미루지 않고 이뤄야 한다는 일기가성(一氣呵成), 뜻이야 좋다. 하지만 민심의 경고를 염두에 두지 않은 자화자찬 일색의 상황해석은 무엇에 근거를 두신 것인지 걱정이 앞선다.
특히 ‘지난 3년간 이뤘던 모범적인 금융위기 극복 및 향상된 국격 등을 기반으로 선진 일류국가의 최종 목표를 위해 자만하지 않고 더욱 내실을 다져나가자는 의미, 국운 융성의 절호의 기회를 맞아 국민이 단합해 안팎의 도전을 극복하고 선진국의 문턱을 막힘없이 넘어가자는 염원’ 등의 의지가 담긴 신년사에서 국민이 느낄 아쉬움의 파장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현실과 유리된 대통령의 상황인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철렁한 기분이었다.
자신은 권력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 아니고, 임기 마지막 날까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인데 레임덕하고 무슨 관련이 있느냐며 납득할 수 없다고 강변했는데 본인으로서는 진심인 것 같았다.
권력을 쓰지 않는 대통령이라....
판단력의 오류가 문제인지 인의 장막이 문제인지 나조차 헷갈리게 되는 대목이었다.
대통령의 권력은 국가 통치의 근원점이다. 권력을 쓰지 않는 대통령의 존재는 도대체가 말이 안된다. 불행한 일이다. 5%의 소수가 국부의 95%를 쥐락펴락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국민과 정부 사이의 공감 영역이 갈수록 취약해 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산은 정상을 향해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가 훨씬 더 위험하다고 한다. 권력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임기가 가까워질수록 역사에 남을 업적을 남기겠다는 초조함과 성급함이 일을 그르치는 결정타가 될 수도 있다.
통합과 소통만이 해결책인 현실직시가 있어야겠다. 노장청이 하나가 되어 화합을 이루면 못할 일이 없다는 의지와 각오로 임할 일이다. 21세기 리더십의 화두가 소통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남과 북의 가슴이 한 마음으로 꽃 피울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지도자와 국민 사이에서도 똑같은 화두가 둥지를 트게 될 그 날을 고대한다. 그리하여 이 다음 사자성어에서는 태평성대의 노래들이 흘러 넘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
(2011. 1. 3)
...홍문종생각
해마다 연말연시면 각종 사자성어들이 넘친다.
촌철살인의 현실 비판과 풍자의 대리만족이 주는 매력 때문인지 반향도 큰 편이다. 중 전국의 대학교수들이 매년 연말과 연초에 각각 선정해서 발표하는 사자성어가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1년을 '장두노미'(藏頭露尾)로 선정, 진실을 감추려는 정부의 어리석음을 꼬집었던 이들이 이번에는 ‘민귀군경’(民貴君輕)으로 신묘년 새해 희망에 대한 기대감을 표명했다. 백성이 제일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임금이 제일 가볍다'는 뜻이란다.
왜 하필 맹자의 민본 사상인지 모두가 무겁게 고민해야 할 사회적 명제가 아닌가 싶다.
우리 사회의 정신적 리더격인 대학교수들이 국민존중 화두를 환기시킬 때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 들어 대다수의 국민들이 편치 않은 일상을 보내고 있는데 안보불안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관권이 인권을 경시하고 부자가 빈자 위에 군림하며 권력의 횡포가 자정되지 않는다는 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사상최대의 무역흑자와 4.5%의 경제성장, 외교적 역량이 확장되고 국격이 높아졌다는 '낭보‘를 쏟아내도 박탈감에 시달리는 국민에게는 허공의 메아리 일 뿐이다.
임기 4년차에 접어들면서 레임덕이 본격화 되는 느낌이다. 곳곳에서 권력누수 조짐이 목격되고 있다. 다른 정권과 유사한 경로를 걷고 있는듯 한데 나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레임덕이 본격화되면 이를 피하기 위한 권력 중심부의 무리수가 커지기 마련이다. 권력 기관들의 눈치보기도 늘어날 수 밖에 없다. 그럴수록 '민귀군경'의 충고가 절실할 테지만 현실은 그다지 녹록한 편은 아니다. 민심 위에 군림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속성 때문이다.
권력의 중심부의 있는 사람들이 권력에 취해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니 더 큰 문제다. 어차피 무위로 돌아가게 돼 있는 권력인데 그 한계점을 잊고 마치 영원무궁한 절대치를 소유한 마냥 현실을 망각하기 일쑤다. 국민을 틀어 쥐려는 권력이 성공한 예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모든 것이 환타지의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인정하게 될 때까 그 헛된 시도를 멈추지 못하니 큰일이다.
간과할 수 없는 건 훨씬 나빠진 정국 상황이다.
대학교수들이 선정한 사자성어의 변환과정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정황이다.
2009년 말엔 '방기곡경'으로 바른 길을 좇아 정당하게 일하지 않고 그릇된 수단을 써서 억지로 일을 한다고 정부정책을 비판한 바 있다. 그 1년 뒤인 2010년 사자성어는 '장두노미'였다.
그러던 것이 2011년 새 사자성어는 더 강경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 바로 '민귀군경'이다. 계속 그런 식의 실정이 이어진다면 사직이나 임금보다 훨씬 귀한 백성을 위해 모종의 조치를 취할 가능성을 시사하는 사자성어다. 중요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임금을 희생시킬 수도 있다는 아주 무서운 선언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공공연히 민란 봉기를 선동하는 움직임이 없는 것도 아니다. 과거와 달라진 풍경이라 하겠다. 우리가 사자성어를 관전하는 포인트를 여기에 둬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대통령의 신년사는 민심을 읽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좋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미루지 않고 이뤄야 한다는 일기가성(一氣呵成), 뜻이야 좋다. 하지만 민심의 경고를 염두에 두지 않은 자화자찬 일색의 상황해석은 무엇에 근거를 두신 것인지 걱정이 앞선다.
특히 ‘지난 3년간 이뤘던 모범적인 금융위기 극복 및 향상된 국격 등을 기반으로 선진 일류국가의 최종 목표를 위해 자만하지 않고 더욱 내실을 다져나가자는 의미, 국운 융성의 절호의 기회를 맞아 국민이 단합해 안팎의 도전을 극복하고 선진국의 문턱을 막힘없이 넘어가자는 염원’ 등의 의지가 담긴 신년사에서 국민이 느낄 아쉬움의 파장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현실과 유리된 대통령의 상황인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철렁한 기분이었다.
자신은 권력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 아니고, 임기 마지막 날까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인데 레임덕하고 무슨 관련이 있느냐며 납득할 수 없다고 강변했는데 본인으로서는 진심인 것 같았다.
권력을 쓰지 않는 대통령이라....
판단력의 오류가 문제인지 인의 장막이 문제인지 나조차 헷갈리게 되는 대목이었다.
대통령의 권력은 국가 통치의 근원점이다. 권력을 쓰지 않는 대통령의 존재는 도대체가 말이 안된다. 불행한 일이다. 5%의 소수가 국부의 95%를 쥐락펴락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국민과 정부 사이의 공감 영역이 갈수록 취약해 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산은 정상을 향해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가 훨씬 더 위험하다고 한다. 권력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임기가 가까워질수록 역사에 남을 업적을 남기겠다는 초조함과 성급함이 일을 그르치는 결정타가 될 수도 있다.
통합과 소통만이 해결책인 현실직시가 있어야겠다. 노장청이 하나가 되어 화합을 이루면 못할 일이 없다는 의지와 각오로 임할 일이다. 21세기 리더십의 화두가 소통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남과 북의 가슴이 한 마음으로 꽃 피울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지도자와 국민 사이에서도 똑같은 화두가 둥지를 트게 될 그 날을 고대한다. 그리하여 이 다음 사자성어에서는 태평성대의 노래들이 흘러 넘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
(2011. 1. 3)
...홍문종생각
2011년 1월 2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행복하려면
행복하려면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세계 경제규모 13위.
괄목할만한 대한민국 경제 지표다.
전 세계가 ‘한강의 기적’을 배우겠다며 대한민국으로 몰려드는 정황인데도 정작 당사자인 우리 국민 상당수는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있단다. 기회가 되면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을 만큼 국가적 자부심이 결여된 것으로 조사됐다니 아이러니다. ‘돈에 대한 집착’과 ‘안보 불안’이 낮은 행복지수의 결정적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는데 국가와 정치에 대한 불신이 작용하는 바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이는 2010년을 보내는 연말 송년 모임 자리에서도 자주 접하게 되는 여론이다. 과거에 비해 모든 여건들이 월등히 나아졌는데도 국민의 행복지수가 오르지 않는 데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일종의 국가적 자부심의 향방과 무관하지 않다는 중론이다. 우리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 처해있는 인도네시아나 베트남 국민들은 스스로를 행복해 한다는 데이터가 있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저서로 우리 사회에 ‘정의 신드롬’을 몰고 온 하버드대학 마이클 샌들 교수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비슷한 지적을 했다.
샌들 교수는 연평도를 공격해 온 북한에 대한 우리의 즉각적인 대응이 ‘정의’의 본질이지만 신중함과 균형을 이룬 이성적 판단 역시 정의의 또 다른 결론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장기적인 안목과 큰 틀 차원의 접근이 우리의 안보불안 해소에 더 바람직한 해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북한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이 크겠지만 침고 기다리는 인내심이 진짜 정의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겠다. 정치지도자에게 조급하게 독촉하며 밀어붙이기보다 장기적으로 안정될 수 있다는 확신 아래 보복을 유예해보는 것도 긍정적 전략의 한 차원이 될 수도 있다는 견해였다. 그런 맥락에서 국민으로부터 불신받고 있는 정치권의 고민도 함께 진행돼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의 시장 중심은 결국 개인적 소비를 토대로한 지나친 욕심 때문에 시장이 제기능을 잃고 급기야는 사회적 혼란을 야기 시켰다는 샐든 교수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샐든교수의 지적처럼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어있는 시장이 사회적 통합, 안보, 평등, 커뮤니티와 개인의 권리에 대한 존중 등 고귀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에 필요한 가치들을 훼손시켰다는 책임의식이 문제 해결의 동기로 작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스스로의 책임이라는 인식아래 부단히 자기 역할을 찾는 것이 시장의 기능을 긍정적으로 되돌리고 공정사회에 대한 자부심을 회복시킬 수 있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한국의 정치 불신 역시 지나치게 경제적인 부분을 중시하면서 정의와 같은 문제를 소홀히 한 결과로 진단하기도 했는데 우리 모두가 귀 기울여야 할 대목이라고 본다.
우리에게 불행한 역사가 존재하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질곡의 역사 속에서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인간 본연의 속성을 드러내기도 했고 숨 가쁜 여정을 달려오기도 했다. 아직은 그 긴 터널을 다 벗어났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자신 스스로를 격려하고 다독거리면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상대적 박탈감을 배려하는 소비패턴과 공정과 정의를 위한 나름대로의 노력을 통해 스스로가 먼저 바뀌려는 노력의 선행도 국민적 자부심을 살릴 수 있는 한 해법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북한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도 결국은 마찬가지다. 누구가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증 보다는 우리 국민 스스로에 달려있다는 확신을 갖고 자신에 대한 신뢰감을 높일 수 있어야겠다. 우리가 결국 해낼 수 있다는 자긍심 같은 것이 문제해결의 최대 지름길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나 역시 반세기 넘게 살아온 지난 삶을 돌아보면 덜미를 잡히는 고비가 적지 않았다.
생각자체가 복잡한 만큼 우여곡절의 상흔이 더 치명적인 아픔으로 다가올 때가 많았다.
그러나 단 한번도 스스로에 대한 확신의 끈을 놓은 적이 없었던 나다.
지금 그것은 내 삶을 지탱시키는 자부심의 근원이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라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은, 자랑스러운 나의 신념적 구호가 되었다.
2011년 화두는 자부심 회복의 전초전 차원에서 ‘자중자애’로 삼아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송구영신의 시점에서 저마다 자기 삶에 충실했던 증거를 들어 스스로를 대견해하고 자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그 결과가 스스로에 대한 신념과 신뢰를 키우는 계기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말이다.
그런 변화들이 각자의 인생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동기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나 신념은 단지 긍정적인 사고가 성공 국면에서 더 큰 의미로 다가오기를 바라는 마음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성공한 주변인물을 보면 대부분 자기 스스로를 믿고 소중하게 여기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성공한 사례를 본 적이 없다.
자기반성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해 자신의 단점을 분석하고 개선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은 ‘성공’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키워드다. 불변의 법칙이다.
인생의 참된 가치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에 있다고 한다.
속도는 욕망이지만 방향은 가치를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된다는 측면에서 가슴에 담아둘 의미를 찾게 된다.
행복을 지향하는 또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11. 1. 2)
....홍문종 생각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세계 경제규모 13위.
괄목할만한 대한민국 경제 지표다.
전 세계가 ‘한강의 기적’을 배우겠다며 대한민국으로 몰려드는 정황인데도 정작 당사자인 우리 국민 상당수는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있단다. 기회가 되면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을 만큼 국가적 자부심이 결여된 것으로 조사됐다니 아이러니다. ‘돈에 대한 집착’과 ‘안보 불안’이 낮은 행복지수의 결정적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는데 국가와 정치에 대한 불신이 작용하는 바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이는 2010년을 보내는 연말 송년 모임 자리에서도 자주 접하게 되는 여론이다. 과거에 비해 모든 여건들이 월등히 나아졌는데도 국민의 행복지수가 오르지 않는 데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일종의 국가적 자부심의 향방과 무관하지 않다는 중론이다. 우리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 처해있는 인도네시아나 베트남 국민들은 스스로를 행복해 한다는 데이터가 있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저서로 우리 사회에 ‘정의 신드롬’을 몰고 온 하버드대학 마이클 샌들 교수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비슷한 지적을 했다.
샌들 교수는 연평도를 공격해 온 북한에 대한 우리의 즉각적인 대응이 ‘정의’의 본질이지만 신중함과 균형을 이룬 이성적 판단 역시 정의의 또 다른 결론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장기적인 안목과 큰 틀 차원의 접근이 우리의 안보불안 해소에 더 바람직한 해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북한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이 크겠지만 침고 기다리는 인내심이 진짜 정의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겠다. 정치지도자에게 조급하게 독촉하며 밀어붙이기보다 장기적으로 안정될 수 있다는 확신 아래 보복을 유예해보는 것도 긍정적 전략의 한 차원이 될 수도 있다는 견해였다. 그런 맥락에서 국민으로부터 불신받고 있는 정치권의 고민도 함께 진행돼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의 시장 중심은 결국 개인적 소비를 토대로한 지나친 욕심 때문에 시장이 제기능을 잃고 급기야는 사회적 혼란을 야기 시켰다는 샐든 교수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샐든교수의 지적처럼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어있는 시장이 사회적 통합, 안보, 평등, 커뮤니티와 개인의 권리에 대한 존중 등 고귀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에 필요한 가치들을 훼손시켰다는 책임의식이 문제 해결의 동기로 작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스스로의 책임이라는 인식아래 부단히 자기 역할을 찾는 것이 시장의 기능을 긍정적으로 되돌리고 공정사회에 대한 자부심을 회복시킬 수 있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한국의 정치 불신 역시 지나치게 경제적인 부분을 중시하면서 정의와 같은 문제를 소홀히 한 결과로 진단하기도 했는데 우리 모두가 귀 기울여야 할 대목이라고 본다.
우리에게 불행한 역사가 존재하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질곡의 역사 속에서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인간 본연의 속성을 드러내기도 했고 숨 가쁜 여정을 달려오기도 했다. 아직은 그 긴 터널을 다 벗어났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자신 스스로를 격려하고 다독거리면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상대적 박탈감을 배려하는 소비패턴과 공정과 정의를 위한 나름대로의 노력을 통해 스스로가 먼저 바뀌려는 노력의 선행도 국민적 자부심을 살릴 수 있는 한 해법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북한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도 결국은 마찬가지다. 누구가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증 보다는 우리 국민 스스로에 달려있다는 확신을 갖고 자신에 대한 신뢰감을 높일 수 있어야겠다. 우리가 결국 해낼 수 있다는 자긍심 같은 것이 문제해결의 최대 지름길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나 역시 반세기 넘게 살아온 지난 삶을 돌아보면 덜미를 잡히는 고비가 적지 않았다.
생각자체가 복잡한 만큼 우여곡절의 상흔이 더 치명적인 아픔으로 다가올 때가 많았다.
그러나 단 한번도 스스로에 대한 확신의 끈을 놓은 적이 없었던 나다.
지금 그것은 내 삶을 지탱시키는 자부심의 근원이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라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은, 자랑스러운 나의 신념적 구호가 되었다.
2011년 화두는 자부심 회복의 전초전 차원에서 ‘자중자애’로 삼아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송구영신의 시점에서 저마다 자기 삶에 충실했던 증거를 들어 스스로를 대견해하고 자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그 결과가 스스로에 대한 신념과 신뢰를 키우는 계기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말이다.
그런 변화들이 각자의 인생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동기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나 신념은 단지 긍정적인 사고가 성공 국면에서 더 큰 의미로 다가오기를 바라는 마음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성공한 주변인물을 보면 대부분 자기 스스로를 믿고 소중하게 여기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성공한 사례를 본 적이 없다.
자기반성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해 자신의 단점을 분석하고 개선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은 ‘성공’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키워드다. 불변의 법칙이다.
인생의 참된 가치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에 있다고 한다.
속도는 욕망이지만 방향은 가치를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된다는 측면에서 가슴에 담아둘 의미를 찾게 된다.
행복을 지향하는 또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11. 1. 2)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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