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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환
요즘들어 갑작스레 집안에 우환이 많아졌다.
병원을 차려야한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로 환자가 늘고 있다.
지난 달 허리 병으로 입원하신 어머님에 이어 이모님, 그리고 고종사촌 매형과 형님이 같은 병원에 누워계신다. 그렇지 않아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계시는 아버님 때문에 심란한데 마음이 무겁다.
형님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에 많이 놀랐다.
그러나 병상의 형님을 보는 순간 타임 테이블이 40여 년 전으로 되돌려졌다.
언어를 잃은 와중에도 빛을 발하는 그의 백만불짜리 미소 때문이었다.
고모(형님의 어머니) 댁은 일일이 기억하기 어려울 만큼 식구가 많았다. 고모부는 성실하신 분이었지만 전쟁을 겪은 살림살이가 수월한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고모는 늘 뚱한 표정이었다. 무뚝뚝한 고모의 미소는 특별했다. 어쩌다 한 번 웃으면 그동안의 서먹함이 단숨에 사라지게
하는 묘한 힘을 발휘했다.
그 양질의 유전인자를 물려받은 사람이 형님이었다.
어린 시절 고모님 댁을 자주 찾았던 건 열 살 넘는 나이터울에도 불구하고 나와 죽이 잘 맞는 형 때문이었다. 역할놀이를 하면서 놀았는데
형은 선량한 시민, 나는 뒷주머니를 노리고 쫓아가는 도둑역할을 했다. 또 해진 후 뒷산 개울에서 찬물로 목욕을 하며 덜덜 떨던 기억도 있다. 뭘
해도 마냥 즐겁기만 하던 그 시절 추억을 함께 하던 형이 어느 덧 칠순의 노인이 되어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현실이 허무했다.
추억의 꼬리가 매형의 병실로도 이어졌다.
마침 누나도 계셨는데 중학생 무렵, 어머니와 함께 내 방에 와서 내가 자는 줄 알고 결혼할 매형 얘기를 하며 ‘결혼작전’(?) 짜던 내용을
엿들었다고 했더니 펄쩍 뛰셨다. (아마도 당시 매형을 좋아하던 누나가 어머니께 지혜를 구하던 상황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날
좋아했지 내가 언제 홍씨(누나는 이씨 성이고 매형은 홍씨)를 좋아했느냐”며 시치미를 뗐다.
그러자 뇌졸 증세로 말하기가 어려운 매형이 손가락질까지 하면서 극구 부인하고 나서 모두를 웃게 했다.
그렇게 잠시 웃음기가 도는 사이, 조카들에게 ‘앞으로 니들이 잘해야 한다’는 내용의 일장연설을 남기고 병원을 빠져나왔지만 허전함이 여전히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병실의 어른들을 찾아뵈면서 운명 앞에서 더 겸허해지는 마음이다.
어떤 인생도 생과 사의 구분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깨달음을 공고히 다지게 됐다.
특히 주어진 내 삶에 최선을 다해야겠다 다짐하는데 면회 갔을 때 들었던 A의원의 탄식이 새삼 떠올랐다.
고작 5년 권력에 불과한데 대통령 주변인들이 천년만년 불변의 권력으로 착각하고 있어 안타깝다는 토로였는데 내게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5년이라는 한시적인 기간 동안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 권력에서 내려올 때 진정어린 박수갈채를 받을 수 있는 일....
그게 뭘까를 궁리하게 만들었으니.
(2013. 4. 16)
...홍문종 생각
花無十日紅
화무십일홍, 사라지는 권력의 허무한 뒷모습을 이보다 더 절묘하게 표현할 단어가 있을까 싶다. 숱한 학습효과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권력의 무상함으로 인간의 한계를 경고하는 촌철살인의 전율도 느껴진다.
요 며칠 ‘특별사면’ 건으로 인수위와 청와대 주변인들 모습이 뒤엉켜 뉴스화면을 어지럽히고 있는 현상을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권력형 비리로
수감된 대통령 측근 사면을 반대하는 쪽과 이를 묵살하고 대통령의 ‘고유권한’을 행사하려는 현직 대통령 간 기 싸움 정도로 보도되고 있지만 본질을
비껴갔다는 생각이다. (종국에는 이례적으로 대통령 당선인까지 나서서 ‘권력남용’이라고 만류했는데도 이명박 정권의 개국공신을 포함한 특별사면을
단행, 국민적 공분을 자초했지만.)
물론 사면초가처럼 몰아세우는 반대기류에도 ‘특사’를 감행해야 하는 나름의 고충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배려하면서
심사숙고했다면 좋은 모양새가 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이번 사면갈등은 현직 대통령의 사적 의도가 과했다는 판단이다. 명분 없는 측근을 내세우기보다 민생을 헤아리고 보듬는 사면이었다면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대통령을 향해 따뜻한 마음으로 응원할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조금은 더 가까이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됐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순간에 움켜쥔 주먹에 힘을 주는 모습은 볼썽사납다 못해 연민의 정마저 느끼게 한다. 소탐대실, 패착도 이런
패착이 없다. 피치 못할 사정이었다면 차라리 후임자에게 그 선택을 맡기는 게 더 지혜로운 처신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평생을 새겨온 뜻으로 ‘고지’에 오르고서도 비운의 역사로 마감한 경우가 많은데
결정적인 순간에 바른 처신을 못한 이유가 크다.
우리 정치라고 다르지 않다.
YS, DJ, MH... 앞서의 선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막 권력의 뒤안길을 향해 걸음을 떼기 시작한 MB 역시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5년 전, 천년만년 이어질 것 같던 욱일승천 기세는 보이지 않고 초라하고 불안한 현실만이 그의 종말을 함께 하는 건 누구도
부정하진 못할 것이다.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이 존재하게 돼 있는 세상의 법칙을 명심했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떠나는 권력의 뒷모습을 조금은 더 따뜻하게 지켜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에.
비정한 정치현실이 그 어느 때보다 실감나는 요즈음이다.
어느 누구도 떠나는 이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떠나는 권력에게도 기꺼운 마음을 담아 박수 칠 수 있는 정치적 관행을 정착시킬 때다.
최상의 격려로 전임자의 기를 살리고 새로운 권력에게는 제대로 일할 수 있게 여건을 조성해 주는 성숙함이 우리네 정치판에 정착돼야
한다. 그리하여 갈수록 각박해져가는 세상인심 속에서 그나마 정치가 위안을 주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여러분과 함께
말이다.
(2013. 1. 30)
.....홍문종 생각
가을 남자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한결 섬세해진 마음결이 조심스러운 계절이다.
미세한 통증 하나에 가슴 전체가 순식간에 텅 빈 동굴로 초토화되거나 바스락 구르는 낙엽소리조차 예사로이 넘겨지지 않는 고감도 감성이 때때로 천형이 되어 신상을 들볶고 있다.
흐르는 세월에도 변하지 않는 가을의 내 모습이다.
그렇게 통과의례처럼 가을을 앓고 있는 것이다.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나는 밤.
아직은 건재함에 안심하면서도 쫓기는 듯한 이 불안감은 뭔지 모르겠다.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유한성을 알리는 신의 엄중한 경고일까?
감정과 감정 사이를 흐르는 심연과 날카로운 바위들에 놀라고 다치다 좌절하고 포기하는 나약한 모습은 도처에 깔린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세상을 비추는 거울 앞에 적나라한 나상으로 서 있노라면 세상의 명예도 권력도 그 무엇도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복이 절로 튀어나온다.
그러면서도 끝내 그것을 내려놓지 못해 불면을 키우고 있는 이 어리석음이 인간의 한계다.
알고 있으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이중적이지만 지극히 인간적이라는 변명으로 위안을 삼아보지만 엄청난 압박을 피할 수 있는 방패막이가 되기엔 한참은 역부족인 현실을 실감하게 된다.
잠 못 이루며 뒤척이다 고개 들어 가을 밤하늘을 쳐다보니 날 선 빛으로 박혀있는 달과 별이 눈에 들어온다. 얼마나 선명한 지 파르르한 떨림까지 전해질 기세지만 여느 때와는 달리 유난히 먼 거리에 놓여있는 느낌이다. 선명하다고 해서 거리가 늘어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의 거리가 달라졌을 뿐이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발견하기가 어렵지 않다. 실제로 깨끗해서 선명한 대상에 거리감을 갖거나 경원시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판단의 오류가 선호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깨끗한 결론이나 대상을 도외시 하려는 건 배제돼야 할 속물근성이다.
새삼스런 깨달음이 힘이 되고 있으니 다행이다.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이고 보면 ‘가을을 탄다’는 자체를 사치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불황의 늪에 빠진 경제상황 때문에 약간의 냉기에도 쉽사리 움츠러들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둔감하게 지나치기보다는 더 적극적인 모습으로 가을과의 조우를 권면하고 싶다.평생을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다간 법정 스님이 생전에 쓰신 글 중에 가을을 참 이상한 계절이라고 표현한 대목이 있다. 그러면서 푸른 하늘 아래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가을 나무에게서 착해지고 싶게 만드는 충일의 순간을 포착한 적이 있음을 고백했다.
법정스님하여금 비어있음과 충만을 동일시하도록 작용한 권력이 있다면 오로지 가을뿐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계절의 변화와 가을의 서풍, 떨어지는 나뭇잎 등은 우리 자신을 한번쯤 돌아볼 수 있게끔 배려한 신의 선물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굳이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인간이 살아가면서 평생 화두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 구하기의 일환이라는 쪽에 무게를 싣게 된다. 어쩌면 인간 삶의 근원을 묻는 질문에 각 개인 저마다의 질문이 맞닿아 양산되는 수 만개의 서로 다른 대답들이야말로 가을앓이의 본질이라는 데 까지 생각이 미치게 된다.
올 가을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창조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묻고 그에 대한 답을 내놓는 과정을 통해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수많은 사람들의 서로 다른 삶들과 견줘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녕 감사해야 할 일이다.
가을남자 앞으로!!
세상이 아무리 슬프게 해도 그것에 스스로를 함몰시키는 불행은 자초해서는 안된다.
이 가을이 위축된 세상 모든 남자들에게 커다란 위안으로 존재할 수 있기를.
(2011. 10.18)
...홍문종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