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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27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어떤 죽음

어떤 죽음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유병언이 전라도 순천 매실 밭에 망자의 이름을 달고 나타났다.
고가의 명품에 휘감긴 채 본인 여부는 물론 사인 확인도 어려울 정도로 훼손된 상태로 발견됐다는 소식이다.
매스컴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황제처럼 신처럼 시대를 풍미하던 그였다. 재벌가 회장 못지않은 부를 누렸다. 카메라 셔터 한 방이나 낙서 같은 메모만으로 수많은 걸작(?)을 배출하면서 불멸(?)의 예술가 대접을 받았다. 교주를 향한 추종자들의 맹종적 헌신도 빼놓을 없는 로열티였다.

그런 그가 육포 2조각과 검은 콩 20알에 의존해 산길을 헤매다 명을 재촉했다니 모두가 허를 찔린 표정이다.
결국 끝없이 움켜쥐려 했던 재물, 권력, 명예 어느 것도 기로에 선 사내의 절박함을 덜어주지 못했다는 결론이다. 참으로 허망하고 또 비정한  탐욕의 끝이었다.
그나마 70 평생을 세상의 부귀영화를 향해 부나비의 욕망을 품다가 생을 닫아버린 실증이 되어 경종을 울리고 있으니 다행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싶다.

    
아닌 게 아니라 하늘의 징벌이 이미 시작됐나 싶을 만큼 비참한 말로가 드라마틱하게 전개되고 있다.
실제 사내의 시신은 차디 찬 냉동고에 들어가 있다. 죽어서도 범죄 소명의 굴레를 벗지 못한 탓이다. 그나마 그를 거둘 가정도 풍비박산 난 지 이미 오래다. 가족 대부분 수감되거나 도망자 신세로 전락한 현실이다.
누구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는 분위기다.
생전에 제대로 살지 못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비정하리만큼 냉정한 셈법이 작동된 결과다
    
도스토예프스키는 27세 때 사회주의 혁명모임에 연루됐다가 총살형을 받고 처형 직전 사면된 경험이 있는데 이 때의 무시무시한  공포를  자신의 작품('백치’)에 반영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이가 사형집행 전 5분을 어떻게 활용하려 했는지를 설명하는 과정을 통해서다.
소설 속 화자는 동료들과의 작별에 2분을, 자기성찰에 2, 나머지 1분은 주변을 둘러보는 데 쓰겠다고 했는데 나라면 어떤 선택이었을까, 생각의 여지를 주는 장면이었다.   
    
너나없이 어떻게 태어나느냐 보다 어떻게 죽느냐에 더 방점을 찍으며 살아야한다는 생각이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가치 평가도 마찬가지다.
생전에 얼마만큼 물량을 늘렸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나눴느냐에 관점을 두고 그 삶의 가치를 논하는 게 옳다.
누구도 죽음으로 한계가 그어지는 삶의 여정을 모르지 않는다. 벗어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협한 이기심에 갇혀 움켜쥐려는 부조화의 삶을 지향하고 있으니 아이러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누구보다 공적인 마인드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나름의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막상 죽음에 대한 질문 앞에 서게 된다면 얼마나 당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머뭇거림 없이 명확한 대차대조표를 내밀게 될 때 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불가피할 것 같다.
    
나는 마지막을 무엇으로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가
공공의 표적이 된  사내의 마지막이 나로 하여금 죽음의 명제에 천착하도록 이끌고 있다.  
깊은 밤 폭우 쏟아지는 운동장을 누비며 스스로를 담금질하라고 부축이기도 한다.       
천둥번개, 소나기, 불볕더위....
머잖아 한 해의 종착역을 향하는 달음박질로 숨을 고르게 될 터이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준비 해야겠다.        (2014. 7.26)

                                                                ...홍문종 생각​

2011년 4월 24일 일요일

홍문종 생각 - 고용세습



고용세습
역시 인간의 욕심이 문
제다. 
탐욕 때문에 매번 그 자리에 머물게 되면서도 흔쾌히 놓을 수 없어  한계에 노출되는 딜레마가 반복되는 것 같다.
탐욕은 패착을 초래하게 돼 있는데  이는  우선  당장  현대자동차  노조의 자가당착으로  현실에서 확인하고 있는 바다.
노조는 25년 이상 장기근속자의 자녀가 원하면 정규직 신분을 보장해 달라는, 이른 바 고용세습 단협안을 사측에 요구했다는  소식에 비난 여론이 봇물을 이룬다. 자기 배만 부르면 된다는 식의 탐욕을 부린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귀족 노조’라는 곱지 않은 별칭을 달고 있는 처지다.
더구나 그동안 경영권 세습을 비난하던 행보 때문에라도 노조의 고용세습 요구는 명분도 설득력도 없다.
도대체 이들의 이기적인 요구가 외교통상부의 장관 딸 특채 사건이나 내로라하는 재벌가의 2,3세 경영 세습과 무엇이 다른 지 묻고 싶다. 자신들이 그토록 입에 거품을 물고 반사회적 이슈로 몰아세우던 사안들과 뭐가 다른 건지 모르겠다.
그저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식의 이중적 행태였던  것이다. 
 
현대 자동차가 누구나 적을 두고 싶어 하는 좋은 직장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고용세습이 기업은 물론 당사자들에게 생산적인 동기를 부여하는 기회가 될 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정당한 경쟁 구도는 구성원 저마다의 개인적 기량을 활성화 시키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거치지 않고 특혜로 직장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경쟁력을 양산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하는  것이다.  개인적 소양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현대자동차가  세계적 브랜드로 자리 잡을 수 있기까지는 구성원의 역할이  지대했다. 
구성원의 뛰어난 경쟁력이 현대 자동차를 세계 시장 반열에 우뚝 설 수 있게 한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앞으로 국제사회의 경쟁 가도는 점점 더 거세지고 한국에  대한 압박 역시  더 심해지는  추세인데  능력과 상관없이 고용세습이 이뤄진다면 결과는 보나마나다. 해당 기업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전체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돼 있다.
노조의  집단 이기심이  심각한 국가적 손실 차원으로 확대되는 결과를  배제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자식이 고우면 떡보다 매를 들어야하고 고기를 잡아주기보다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자식 훈육의 기본이다.  그런 측면에서  고용세습을 해석하자면  기업의 안녕 뿐 아니라 자식들의 미래에도 바람직하지 못한 선택이  될 게 분명하다.  노조는  자식의 취업을 걱정하면서도 특별 채용이 자식들의 경쟁력을 퇴화시키게 될 가능성은 간과하는 우를 범했다.   쇠를 부식시키는 ‘녹’처럼 생존의 치열함을 알지 못하는 무사안일함이 어떤 식으로 기업은 물론 자식들을 망가뜨리게 될지에 대한 고려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부모의 과잉 애정이 자식들의  앞날에 장애가 되는  부작용이 속출하는 요즈음이다.  
더구나 청년실업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시점이다. 
그저 내 자식의 안위만 챙기려드는 천박한 이기심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마비된 양심 역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구직난에 방황하는 이 땅의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저버려서는 안되겠다.
그들의 고민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면 최소한 우리 사회가 정의의 질서아래 공정하게 순환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줘야 한다. 그것이  반드시 이행해야 할 우리들의 역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고용세습.
탐욕의 자화상 앞에서  문득  할 말을 잃게 된다.    
부끄러움 때문에 얼굴이 화끈 거린다. 
코미디도 아니고...단순한 해프닝으로  그치길 바라는 마음이다.
많은 이들이 격분하고 거센 비난을 퍼부을 만하다는 생각이다.
                                                      (2011.  4.  23)                     
                                                       ....홍문종 생각                    

2010년 9월 25일 토요일

홍문종 생각 - 길을 묻다

길을 묻다




우연히 오래된 서가에서 ‘쇼펜하우어’의 얼굴을 만났다.


고집스런 표정을 표지로 한 그의 책이 유난히 반갑게 눈에 들어온 건 아마도 고등학교 은사님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인간에게 있어 진정한 자유 경지는 죽음 밖에 없다는 역설로 독일의 수많은 젊은이들을 자살에 이르게 한 염세주의 철학의 대가로 알려진 쇼펜하우어를 전하고자 열정을 다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이들의 삶을 비관에 빠뜨려놓고 정작 자신은 73세까지 천수를 누린 독설가는 좀처럼 우리들과 친근해지지 않았다. 그저 낯설고 어렵기만 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대학에 가서도 여전했다.
몇 번을 반복해서 정독해야 이해될 정도로 난해한 상황은 여전했지만 그동안 덧입혀진 세월 덕인지 쇼펜하우어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의 진의를 이제는 조금 더 알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스스로를 세상에서 특별한 존재라고 여겼던 쇼펜하우어는 철저하게 고독한 생을 살았다. 철저하게 유리된 삶을 고집했다. 심지어 자신의 묘비명에 조차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자신 만의 특별한 삶의 방식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하거나 강요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어리석은 일로 치부하고 금기시했다. 타인의 인정을 끌어내기 위해 상대방을 먼저 인정해주는 식의 처세를 경원시하고 못견뎌했다. 스스로가 위대한 역량을 갖췄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것은 그가 평범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지만 비범하고 잘난 사람이 평범한 척 하는 것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라고 성토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그는 세상으로부터 조금씩 조금씩 고립되어갔던 것 같다.




한가위 연휴동안 체중이 불었다.


절제되지 않은 식탐이 원인이었다.

어느 정도 배부른 상태에서 송편을 집어들면서 이제 이를 끝으로 더 이상 음식에 욕심을 내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도 식탐을 자극하는 다양한 먹거리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젓가락질을 자제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동안 기가 막히게 음식조절을 잘해왔다고 자부하던 터였기에 입맛을 끄는 명절 음식 앞에 힘없이 무너져내린 상황이 무참했다.

그 순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으라고 했던 옛 성현의 충고와 쇼펜하우어의 지적이 오버랩됐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욕구에 의해 지배될 수 밖에 없고 변화에 대한 끝없는 갈망 때문에 결코 충족될 수 없다는 쇼펜하우어의 지적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독과 변화를 향한 갈망 사이에서 갈등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본질에 냉소를 보냈던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변화에 도달하면 또 다시 새로운 갈망을 향해 갈증을 느끼게 돼 있는 인간의 한계를 일찌감치 간파한 그의 외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변화는 새로운 욕구를 합리화시키에 좋은 변명거리에 불과할 뿐인 것을.
한가위의 미덕을 깨닫는 과정에서 쇼펜하우어를 다시 보게 해 준 셈이다.




지금 주위를 둘러싸고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탐욕의 사닥다리가 불안하다.

수없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욕망의 수레를 멈춰지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을 통제할 수 없어 불행을 자초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부나방이 보인다.


그럼에도 묻게 된다.


끊임없이 변화를 요구하고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데 과연 그 끝은 어디일까?


그리고 내가 가야 할 길은 무엇일까?


가을의 길목에서 길을 묻고 있다.


(2010.9.25)
....홍문종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