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다르지만 인생을 걸고 올인한 시험 결과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풍경은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시험이 한 사람의 미래에 결정타로 작용하는 현행 수능제도는 여러 측면에서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에 따른 희비는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일 아침의 악운 때문에-몸이 아프거나 늦는 경우-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수험생의 경우를 생각하면 그리 간단하게 넘길 일이 아니지 싶다. 실제로 돌발적인 상황 때문에 그동안 쌓은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불운이 전체 인생 의 멍에로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통한은 당사자가 아니면 잘 알지 못한다.
개인적으로도 시험 보는 날 아침 갑자기 몸이 아파서 시험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가 이후의 인생이 계속 꼬이는 삶을 살고 있는 경우를 지켜봤는데 여간 딱한 게 아니다. 그야말로 인생 전체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현재의 수능제도는 개선해야 마땅하다.
단 한 번의 기회로 인생의 중요한 진로를 결정짓는 것은 아무래도 적합하지 않다. 여러 번에 걸쳐 제대로 실력을 평가받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바뀌어야 한다. 매번 말하는 바지만 학생들에게 몇 번의 실력 점검 기회를 주고 그 가운데 가장 유리한 성적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싶다.
수능 비율은 대학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대학 입학의 여러 평가기준 중 하나여야 한다는 점을 전제로 해서 말이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실력을 판단할 수 있는 다양한 지표를 근거로 해서 전공의 적합성 여부 등을 면밀하게 진단하는 과정이 선행된다면 당사자의 미래는 물론 대학과 국가 발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 같다.
대학정원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소수점 한자리에까지 수백명의 동점자들이 몰리는 치열한 경쟁상황을 감안해서 대학정원에 융통성이 적용돼야 한다.
1점 차이의 당락 결정이 학생 선발에 있어 어떤 타당성으로 작용하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보다는 차라리 대학 정원을 탄력적으로 운용하는 게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이다. 선택이 어려울 때 한두명 정도의 범주에서 입학 정원을 조정할 수 있는 자율권을 대학에 주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수능이 대학을 결정하는 바로미터가 된다는 점에서 대단히 인생의 중요한 기점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겠다. 수능은 단순한 시험일 뿐 인생을 결정짓는 것도 아니고 결정되도록 방관해서도 안된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잘 치렀으면 잘 치른대로 잘못 치렀으면 잘못 치른대로 다음 인생을 준비하겠다는 현명함과 자신감으로 자기 인생을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는 미래를 밝혀주는 중요한 이정표가 될 수 있지만 미래의 목표를 구속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생에 있어 지나친 자만이나 좌절은 정답이 아니다.
최선을 다해 시험에 임한 것으로 됐다.
일희일비도 금물이다. 낮은 자세로 자기 주변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성공하지만 매사에 일희일비하면서 끌려다니는 사람의 인생은 실패하게 돼 있다.
학교 부적응자로 낙인찍히고 수십 번의 실패를 거듭했던 에디슨, 시험 성적이 안 좋다고 대학입학이 거부됐던 아인슈타인, 명문대학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레이건 대통령, 무엇보다 변변한 졸업장 하나 없이도 굴지의 재벌가를 이룬 삼성이나 현대 창업주들의 성공한 인생을 보라. 그야말로 성공한 인생은 성적순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혹여 주위에 이번 시험으로 마음을 다친 수험생이 있다면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말고 따뜻하고 큰 애정으로 품어주자. 그리고 말해주자.
인생에는 시험 말고도 그들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는 '길잡이'들이 무궁무진하게 널려 있음을.
태풍이 순식간에 거리를 전쟁터로 변신시켰다. 사람이 맥없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가 하면 출근 길 전철은 속수무책으로 묶여버렸다.
자연의 역습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는 것도 곤혹스러웠다.
‘곤파스'의 여진이 채 사라지기도 전인데 이번에는 ‘말로'가 북상중이란다.
게다가 앞으로도 몇 개의 가을 태풍이 더 있다고 하니 근심이 커진다.
차라리 멋모르고 당한(?) ‘곤파스’가 나은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혼란의 와중에 문득 인생이 있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태풍과 닮아있는 우리 삶의 과정이 보였다.
해마다 치르게 되는 연례행사인데도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그 때마다 피해를 반복하는 현상이 서로 닮아 있었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미욱함으로 피해 규모를 키우게 되는 것도 그렇고 일희일비하는 단순함도 그렇다.
인생에 행복이나 불행이 정확하게 예약돼 있는 게 아닌데도 좋은 일엔 그 기쁨이 영원하기라도 한 것처럼, 나쁜 일 앞에선 그 아픔이 영원할 것처럼 일희일비한다. 순간의 감정에 빠져 자신의 인생을 또 다른 형태로 꾸밀 새로운 감정이 예비돼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해 민망함을 자처한다.
근본적으로 인생에서의 행복과 불행은 공존할 수 밖에 없는 존재다.
기쁨과 슬픔은 취사선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현실을 수긍해야 한다. 다만 그 폐해를 예상하고 그 영향력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대비하는 삶의 지혜가 필요할 뿐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근본적으로 인생의 노정에서 불행구간 전체를 들어내는 건 불가능하다. 대신 현명한 대처로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지혜로운 처신이다.
문제는 희망의 존재여부다.
우리 삶에서 희망의 영향력은 예방주사 같은 효능을 발휘한다. 그것은 생각보다 막강하고 결정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지금 이 순간,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인생을 흔들지만 잠시만 인내하면 곧 밝은 햇살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은 천지차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래에 대해 준비하고 대비하는 것은 일종의 희망 세우기인 셈이다.
태풍이 지난 자리에서 그것이 무서운 존재만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인생에서도 같은 현실을 보게된다.
강력한 바람과 폭우가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온갖 텁텁함을 말끔히 정화시키는 현상이 그것이다. 코 끝을 간질이는 청량하게 정화된 공기가 상쾌하다.
매번 태풍은 찾아 올 것이다. 그러나 폭풍 뒤 개인 날이 준비돼 있음을 알고 있기에 태풍을 더 이상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눈부신 태양 빛이 지난 밤 태풍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고 단단함으로 거듭나고 있는 모습이 경이롭다. 한번 무너진 둑이 새롭고 튼실한 제방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예전 어머니들이 출산을 통해 아픈 몸을 치유하던 삶의 지혜와 비슷하다.
태풍을 통해서 자연이 정화되듯 우리 인생에서도 고통이나 슬픔을 통해 새로운 삶의 활력의 근원을 창출해내는 삶의 비밀이 새삼스럽다.
아쉬움이 없는 것도 아니다.
바벨탑으로 신에 맞서다 초토화 된 경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과신하는 어리석음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모습에서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길을 가다 예기치 않은 태풍 앞에서 생존을 위한 건곤일척의 몸부림이 불가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맞서 싸우는 건 결코 지혜로운 처신이 될 수 없다. 성난 바람 앞에 우산을 들이대면 우산이 망가지는 것은 물론이고 때때로 우산주인까지도 바람에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두려워 하지는 말자. 대신 엎드려 피해가는 상책을 쓰자.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고의 상책이라고 손자병법도 말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