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의 설렘으로
‘툭’
사슬이 끊겼다.
긴 옥죄임에서 비로소 벗어나는 이 느낌을 어떤 형용으로 전해야할지 모르겠다.
7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의 공백을 가로지르려니 세상이 온통 연초록 빛 설렘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화벨 울림이 지금의 내 현실을 가장 실감나게 전해주고 있다.
호출을 받고 아침 일찍 부모님 댁을 찾았다.
요 며칠 뉴스메이커가 돼 분주해진 아들의 근황이 걱정돼 불러올리신 눈치다.
아들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신 부모님께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아차 싶었다.
예외 없이 ‘어머니표 산해진미’로 차려진 성찬을 포식하고 난 후, 이런 저런 배경 설명을 해드렸더니 그제야 조금 안도하시는 듯하다.
"그 동안의 정치 방학이 뇌물이나 직권 남용으로 인한 것이 아니기에 너의 정치적 미래를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정치하는 사람으로서 조심하지 못한 불찰이 없다고 할 수 없기에 겸손히 세상에 이해를 구하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를 기화로 국가와 민족 앞에 더욱 더 겸허하게 낮출 수 있는 정치인이 되길 바란다"
음식을 준비하시면서 그 손끝에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다 담으셨을 어머니는 간략하게 당신의 뜻을 전하셨다.
변함없는 신뢰로 언제나 아들의 우군이 되어주시는 어머니는 알고 계시는 것 같다. 당신의 존재가 아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있는가를.
정치 선배 격인 아버지는 좀 더 현실적인 화제로 당신의 부성애를 보여주셨다.
여론의 동향이나 선거 홍보전략 등 앞으로의 정치 일정 등을 궁금해 하시며 적극적인 지지를 약속하셨는데 당사자인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궁리하고 계셨다. (뉴스에서) 5선 의원보다 먼저 언급되는 걸 보니 정치적 거물이 된 모양이라며 마음의 여유를 잃지 말라고 격려해 주시는 가하면 실수 자체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실생활에 적용시키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신신당부하시는 모습에서 무뚝뚝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이 선명하게 보였다.
언제나 넘치는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부모님의 너른 품이 새삼스러운 감회로 다가왔다.
흔쾌히 천군만마의 뒷배를 자처하시는 부모님의 그늘이 내 삶에 얼마나 큰 축복인지도 절실해졌다.
감사하고 죄송하다는 생각이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부추기면서 순환의 역사가 되어 돌고 있다.
4.11 총선 예비후보 등록을 위해 서류 준비 등으로 분주한 하루였다.
처음 출발 하던 그 때처럼 설렘으로 가득해서 새내기가 된 느낌이었다.
진지하고 성실하게 민심을 받든 정치를 실현하겠다는 소망을 크게 품는다. 아웃사이더의 시각으로 지켜본 불합리한 정치적 관행과 구태를, 정밀하게 파헤치고 과감히 개혁하는 데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동안의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버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다.
실제로 나름 느낀 바도 많다.
비온 뒤 더 단단해지는 땅처럼 내 자신 훌쩍 커져 있는 느낌이다.
그렇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출발선에 섰다.
이제 본격적인 시작인 것이다.
(2012. 2.6)
...홍문종 생각
2012년 2월 6일 월요일
2011년 10월 26일 수요일
홍문종 생각 - 칭찬받아 좋은 날
칭찬받아 좋은 날
모교(서울 대광 중고등학교)의 64주년 개교 기념일에 모교를 빛낸 동문상을 받았다. 8년 선배인 무학교회 김창근 목사님, 5년 선배인 대우건설 서정욱 사장님, 그리고 2년 선배인 차병원과 중문의대 차광열 이사장님과 함께였다.
졸업한 지 38년 만에 선후배 동문의 축하를 받으며 시상대에 오르는 기쁨이 생각보다 컸다.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이런 저런 인연으로 상을 받은 경험이 적지 않지만 그 어떤 상보다 나를 설레게 했다. 특히 국회의원도 아닌데 받는 상이어서 더욱 큰 의미로 다가왔다. (국회의원 시절에는 상을 받아도 개운치 않은 경우도 왕왕 있었다) 단순히 상 받는 기쁨으로만 정리되지 않는 묘한 감흥이 ‘모교의 선물’을 더 각별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평소 아끼던 후배들과 친구들의 축하도 행복했지만 무엇보다 부모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어서 그 의미를 더했다. 저녁에 귀가하니 온 가족이 케잌을 사다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부모님께서는 내가 국회의원 당선됐을 때보다 더 들뜬 모습으로 ‘모교에서 칭찬받은 아들’을 자랑스러워하셨다.
그 와중에 어머니께서는 ‘아버지 덕분이라고 아버지에 대한 감사를 잊지 말라는 당부를 챙기시는 한편, 내 아이들에게는 ‘내가 낳은 자식이지만 너희 아버지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라는 단골 레퍼토리로 아들자랑을 겸한 세뇌작업을 잊지 않으셨다.
돌아보면 중고등학교 시절을 비교적 평온하게 보낸 기억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순탄대로였던 건 아니었다.
이유를 따지자면 사연 많은 나의 인생 역정(?)과 무관하지 않다.
나는 모교(대광중학)과의 인연을 입학이 아닌 전학으로 시작했다. 당시 명문으로 꼽히던 수송 초등학교(지금은 중구청으로 쓰이고 있고, 학교는 없어졌다)를 졸업했지만 원하는 중학교 진학에 실패하고 낙향의 길을 걸어야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1년여를,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안 농사를 돕고 소꼴도 베던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던 의정부 중학교에 몸담고 있다가 서울로 귀환한 게 대광과의 첫 조우였다.
과외와 번쩍거리는 구두로 대변되는 당시의 학교 환경은 내게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부각되기에 충분한 자극이었다. 고관대작 자제들이 우글거리던 명문 초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자부심(?)을 재생시켜주기도 했다.
그렇다고 나의 서울 정착이 그렇게 순조로웠던 건 아니다.
친구들의 놀림은 물론 1년 동안 팽팽 놀다가 전학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누구도 의정부에 쌓아올린 내 튼실한 기반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의정부 골목대장 감투도 별 반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서울에 올라와 문전박대를 당하는 상황이었으니 한동안은 생존을 위해 세 과시로 존재감을 증명하는 처지를 감내할 수 밖에 없었다. (오늘 나의 수상을 축하하러 온 친구 중에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하고 최소한 열 번 이상 싸우고 각별한 사이가 된 친구의 얼굴도 있다)
사실 모교의 동문 중에는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많다.
의사나 교수, 목사 등 전문분야에서 두드러진 명성을 얻고있거나 주목받는 사업가들로 성공한 동기들도 많다. 불멸의 야구선수 김재박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나를 ‘자랑스런 동문’으로 지목한 것은 앞으로 모교에 애정을 갖고 모교 발전을 위해 열심히 일해 달라는 주문이 아닐까 싶다.
행사 일정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학교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학교는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거의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학교 다닐 때보다 훨씬 퇴락한 느낌이었다.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모습들 때문에 더욱 초라해 보였다. 40여 년 전만 해도 중고등학교에 드물었던 강당이 있었고 최첨단 어학실과 과학실 그리고 스팀 난방장치 등의 최첨단 시설로 호화 귀족학교 소리를 듣던 위세를 찾아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어떤 식으로든 모교의 과거 명성을 되찾는 데 수고를 아끼지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후배들을 위해 강의 일정을 잡아달라는 교장선생님의 청을 받고 이제는 말이 아니라 실천하는 삶으로 본을 보여주는 선배가 되겠다고 새롭게 새긴 다짐도, 나이가 더 들어버리신 은사님들을 바라보면서 더 자랑스러운 제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칭찬으로 행복한 하루였다.
역시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것 같다.
학교 행사 말고도 전쟁기념관에서의 리더십 강연, 주요 모임의 대표자 회의 등 유난히 일정이 빽빽한 하루였지만 온 종일 들뜬 기분으로 지낼 수 있었다. 모교에서의 감흥이 준 에너지 때문이다.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2011. 10. 25.)
....홍문종 생각
모교(서울 대광 중고등학교)의 64주년 개교 기념일에 모교를 빛낸 동문상을 받았다. 8년 선배인 무학교회 김창근 목사님, 5년 선배인 대우건설 서정욱 사장님, 그리고 2년 선배인 차병원과 중문의대 차광열 이사장님과 함께였다.
졸업한 지 38년 만에 선후배 동문의 축하를 받으며 시상대에 오르는 기쁨이 생각보다 컸다.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이런 저런 인연으로 상을 받은 경험이 적지 않지만 그 어떤 상보다 나를 설레게 했다. 특히 국회의원도 아닌데 받는 상이어서 더욱 큰 의미로 다가왔다. (국회의원 시절에는 상을 받아도 개운치 않은 경우도 왕왕 있었다) 단순히 상 받는 기쁨으로만 정리되지 않는 묘한 감흥이 ‘모교의 선물’을 더 각별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평소 아끼던 후배들과 친구들의 축하도 행복했지만 무엇보다 부모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어서 그 의미를 더했다. 저녁에 귀가하니 온 가족이 케잌을 사다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부모님께서는 내가 국회의원 당선됐을 때보다 더 들뜬 모습으로 ‘모교에서 칭찬받은 아들’을 자랑스러워하셨다.
그 와중에 어머니께서는 ‘아버지 덕분이라고 아버지에 대한 감사를 잊지 말라는 당부를 챙기시는 한편, 내 아이들에게는 ‘내가 낳은 자식이지만 너희 아버지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라는 단골 레퍼토리로 아들자랑을 겸한 세뇌작업을 잊지 않으셨다.
홍문종 총장,
김창근 무학교회 목사, 서종욱 대우건설 사장
돌아보면 중고등학교 시절을 비교적 평온하게 보낸 기억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순탄대로였던 건 아니었다.
이유를 따지자면 사연 많은 나의 인생 역정(?)과 무관하지 않다.
나는 모교(대광중학)과의 인연을 입학이 아닌 전학으로 시작했다. 당시 명문으로 꼽히던 수송 초등학교(지금은 중구청으로 쓰이고 있고, 학교는 없어졌다)를 졸업했지만 원하는 중학교 진학에 실패하고 낙향의 길을 걸어야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1년여를,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안 농사를 돕고 소꼴도 베던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던 의정부 중학교에 몸담고 있다가 서울로 귀환한 게 대광과의 첫 조우였다.
과외와 번쩍거리는 구두로 대변되는 당시의 학교 환경은 내게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부각되기에 충분한 자극이었다. 고관대작 자제들이 우글거리던 명문 초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자부심(?)을 재생시켜주기도 했다.
그렇다고 나의 서울 정착이 그렇게 순조로웠던 건 아니다.
친구들의 놀림은 물론 1년 동안 팽팽 놀다가 전학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누구도 의정부에 쌓아올린 내 튼실한 기반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의정부 골목대장 감투도 별 반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서울에 올라와 문전박대를 당하는 상황이었으니 한동안은 생존을 위해 세 과시로 존재감을 증명하는 처지를 감내할 수 밖에 없었다. (오늘 나의 수상을 축하하러 온 친구 중에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하고 최소한 열 번 이상 싸우고 각별한 사이가 된 친구의 얼굴도 있다)
사실 모교의 동문 중에는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많다.
의사나 교수, 목사 등 전문분야에서 두드러진 명성을 얻고있거나 주목받는 사업가들로 성공한 동기들도 많다. 불멸의 야구선수 김재박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나를 ‘자랑스런 동문’으로 지목한 것은 앞으로 모교에 애정을 갖고 모교 발전을 위해 열심히 일해 달라는 주문이 아닐까 싶다.
행사 일정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학교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학교는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거의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학교 다닐 때보다 훨씬 퇴락한 느낌이었다.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모습들 때문에 더욱 초라해 보였다. 40여 년 전만 해도 중고등학교에 드물었던 강당이 있었고 최첨단 어학실과 과학실 그리고 스팀 난방장치 등의 최첨단 시설로 호화 귀족학교 소리를 듣던 위세를 찾아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어떤 식으로든 모교의 과거 명성을 되찾는 데 수고를 아끼지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후배들을 위해 강의 일정을 잡아달라는 교장선생님의 청을 받고 이제는 말이 아니라 실천하는 삶으로 본을 보여주는 선배가 되겠다고 새롭게 새긴 다짐도, 나이가 더 들어버리신 은사님들을 바라보면서 더 자랑스러운 제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칭찬으로 행복한 하루였다.
역시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것 같다.
학교 행사 말고도 전쟁기념관에서의 리더십 강연, 주요 모임의 대표자 회의 등 유난히 일정이 빽빽한 하루였지만 온 종일 들뜬 기분으로 지낼 수 있었다. 모교에서의 감흥이 준 에너지 때문이다.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2011. 10. 25.)
....홍문종 생각
2011년 9월 15일 목요일
홍문종 생각 - 반중 고운 감
반중 고운 감
지인이 情을 담아 보내온 해산물(전복, 해삼내장, 성게알 등)을 전하러 갔는데 어머니가 한창 즐거워하고 계셨다. 소녀처럼 들뜬 표정이었다.
뭔 일인가 싶었는데 이내 궁금증이 풀렸다.
“문종아, 신문에 네 기사가 나왔더라. 총선 출마가 예상되는데 야당도 여당도 벌벌 떠는 후보가 될 거라더라”
어머니를 그토록 행복하게 만든 일등공신은 신문에 실린 아들에 관한 기사였던 것이다.
어머니께 나는 세상에서 제일 잘난 아들이다.
어머니는 나의 고갈을 막아주시고 뒷배가 되어주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누구보다 깊은 믿음으로 이 아들의 미래를 확신하고 또 간구하고 계신다.
언제나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이 되어 주시고 응원하는 분이시다.
이번 추석에도 어머니는 손주들을 불러다 앉혀놓고 훈육하는 시간을 잊지 않으셨다.
“훌륭한 아버지다. 아버지가 너희들한테 시간을 많이 못 낸다고 서운해 하지 말아라. 어리광을 부리거나 툴툴거리지도 말아라”
말이 훈육이지 실상은 (그들에게는 아버지이고 어머니께는 자식인인) 나를 위하라는 정신교육 내지는 세뇌가 이뤄지는 시간이었다.
늘 하게 되는 생각이지만 어머니는 멋쟁이 중 멋쟁이시다.
8순이 훨씬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현역을 능가하는 감각으로 우리를 놀라게 할 때가 많다. 특히 정치 분야에 대한 식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기량이시다.
아마도 남편과 장남을 정치인으로 뒷바라지 해 오신 오랜 경륜의 결과라는 생각이다.
어머니가 식구들 사이에서 장남인 나의 전속 정치평론가’로 위상을 굳힌 지는 실로 오래됐다. 자타가 공인하는 일급 참모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하루 일과는 날마다 배달되는 20여종의 신문구독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홍문종’으로 검색되는 기사를 하나도 빠짐없이 스크랩하거나 기사의 주요 대목을 별도로 챙겨 내게 전하시는 일도 어머니의 고정 일과 중 하나다. 뿐만 아니다. 경민대학이나 내 블로그 주소를 당신의 컴퓨터에 즐겨찾기로 등록해놓고 일일이 모니터하시거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세상과의 소통을 활발히 하고 계신다.
누구에게나 어머니는 마음의 고향이고 시원으로 존재한다.
여전히 탯줄로 연결돼 뭔가를 공급 받고 있는 듯한 긴밀하고 특별한 느낌을 주는 대상이다.
내 생의 전반에 걸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나보다 더 나를 잘 꿰고 있으면서 한번도 나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은 적이 없는 분이기도 하다.
아직도 어머니와 몇 번은 전화통화를 나눠야 비로소 하루 일과를 마치는 기분인데 학교 업무는 물론 정치 일정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 세심하게 짚어주시는 어머니의 코치가 얼마나 요긴한지 모를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어머니를 통해 상대방을 진정 사랑한다는 것의 실체를 느끼게 될 때가 많다. 사랑을 배우고 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면서 삶의 의미에 좀 더 진지하게 다가가게 되는 것 같다.
특히 명절을 계기로 가족을 만나 정을 나누는 과정을 통해 가족의 의미와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자기 역할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데, 어머니의 헌신이 가장 큰 자극이 되는 것 같다. 어머니처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족을 위하고 특히 자식들에게는 뼈 속까지 그 사랑이 전달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다짐들을 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어리광을 부리고 기댈 수 있는 부모님이 계시다는 건 나에게 더 없는 축복이라는 생각이다.
이번 추석에도 어김없이 우리 집안의 공식게임으로 자리잡은 이북식 윷놀이 대회가 열렸는데 부모님 덕분에 더 행복했다. (의도가 담기긴 했지만) 아버지께 돈 다 잃었다고 투정 부리고 어머니께 1000원만 달라고 떼를 쓰면서 맛 볼 수 있었던 즐거움은 나만의 은밀한 달콤함이기도 했다. 예전과는 다르게 한 시간도 채 안 돼 부모님과 이모님이 체력의 한계를 보이시며 손을 드는 현실이 안타깝기는 했지만 말이다.
.........
밤하늘의 둥근 달이 '반중 고운 감'을 연상시키는 이 밤, 부모님과 함꼐 하는 즐거움을 오래도록 누리고 싶다는 소망이 절실한 간구가 되어 가슴을 저리게 한다. (2011.9,15)
....홍문종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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